쓰레기 고서들의 반란 - 한 인문학자의 섭치 정탐기
장유승 지음 / 글항아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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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에 서점에 가면 그렇게 행복했다.

4월이면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히 멧등 마다,

 그날 스러져간 젊음같은 꽃사태가,

 연련히 꿈도 설워라 여울여울 붉었네'

이영도 시인의 '진달래'를 노래했고,

5월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던 광주의 추억 속에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리워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처럼

오월의 노래 속에서 아카시아 짙은 내음새에 묻은 최루탄 내음으로 봄을 지냈다.

 

비루한 삶을 안고 책방에 가면,

새책에 박힌 문자들의 세례로 내 마음은 황홀했다.

그 책들도 이제 쓰레기 분리배출때 내놓는 애물단지들이 되었지만...

 

일제 강점기 출판 시장 이전의 고서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

그 책들의 가치는 글쎄, 작가의 말대로 쓰레기 수준이다.

 

그러나, 그 안에는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내음새가 가득 담겨있다.

종이로 보면 쓰레기지만, 문자속을 들여다보는 필자의 마음이 향기롭다.

오랜만에 책에서 향기가 나는 사람을 만났다.

문자향 서권기라고나 할까...

쓰레기같은 책들에 대한 변명이지만,

가히 그 고서들이 반란을 일으킬 정도로 용맹스러울지 피식, 웃음이 나지만,

그 책사랑과 공부의 깊이, 넓이가 넉넉하고 향그럽다.

 

섭치(여러 물건 중 변변하지 아니하고 너절한 것)라고 부를 책들.

이 책들은 너덜너덜하게 튿어진 것들 천지고,

멋대로 안팎을 뒤집에 쓰고, 배접을 하고 했다.

그러나, 그 문자향을 지울 수는 없다.

문자향 서권기는 향수처럼 '자동사'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눈을 감고 은은히 그 향을 '타동사'로 찾을 수 있어야 감득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런 경지를 보여주어 흐뭇하다.

 

'백미고사'라는 고사성어집에서 '반듯한 사람 조광봉은 옥계척이라 불렀다'는 구절을 이야기하면서,

 

자는 곧고 딱딱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확한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믿음직한 남자는 답답한 면이 있고, 애교가 많은 여자는 쉽게 토라지는 법입니다.

믿음직하면서 답답하지 않은 남자나 애교만 많고 토라지지 않는 여자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하지만 조광봉은 그렇지 않았나봅니다.

옥은 단단하면서도 질감과 빛깔이 부드러운 느낌을 줍니다.

희귀한 성품의 소유자이니 사전에 실렸겠지요.(27)

 

이야기를 풀어놓는 품이 예사롭지 않다.

뭉글뭉글 의뭉스럽게 다른 이야기를 펼치면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잇닿도록 한다.

쓰레기 같은 책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야기가 찰지고 맛나다.

 

평화로운 부부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면

어떤 경우에도 상대를 무시하는 발언을 해서는 안됩니다.

'국문과 졸업하고서 그것도 모르냐'고 핀잔을 준다거나

'손 없는 날에 일손이 없으면 차 없는 날은 커피가 없겠군' 하고 빈정대서도 안 됩니다.(37)

 

옥룡자 답산가..에서 '손 없는 날' 이야기로 튀었다가 이사 이야기가 나온 부분인데,

스스로 '손재수'를 재물 손해보는 운...으로 잘못알았다 사전 찾아본 이야기가 나온다.

'손'이라는 것은 '날짜에 따라 방향을 달리하여 따라다녀서 사람의 일을 방해하는 귀신'임을 사전에서 배웠음을 실토한다.

잘난 체 하지 않으면서도, 이야기를 엮는 솜씨는 일품이다.

 

드라마의 결말은 대체로 시청자의 기대를 따르는 법입니다.

드라마 전개가 조금이라도 이상하게 나간다는 낌새가 있으면

인터넷 드라마 게시판이 애원과 원망으로 가득차지요.

시청자의 뒤통수를 치는 드라마는 살아남기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사람들은 보고싶은 것만 보고, 보고 싶지 않은 것은 보지않으려 하는 법입니다.

우리 고전소설의 결말이 비슷비슷한 이유도 여기 있다고 생각합니다.(209)

 

고전 소설을 이야기하면서도 쉽게 현실 속의 이야기로 접근하니

낡은 책의 먼지 냄새가 좀 덜 느껴진다.


인문학은 취업을 시켜주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바른 길'을 알려준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다만 인간과 사회를 나름대로 설명하고 예측하는 능력이 인문학의 최전선에 선 대학생들이 반드시 갖춰야 할 무기이고,

그들을 최전선으로 내보내는 사람들은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264)

 

인문학 도서들이 팔리고, '힐링'이 대세라곤 하지만,

인문 대학들은 망가지거나 바꾸는 것이 보통이다.

인문학 중에서도 가장 고루해 보이는 한문학, 고전문학의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인문학의 힘에 대하여 강조하는 것이 당연하다 싶지만,

인문학이 어떤 태도로 삶을 지탱하는 것일지를... 이 책 전체가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의 이야기를 읽어 나가다 보면,

그가 소개하는 책들의 틈속에 담긴 한자들에도,

그 휘갈겨진 초서에서조차도 다사로운 애정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을 가르치는 사람은 득도한 도사가 아닙니다.

학생과 똑같이 고민하고 방황하는 인생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문학이란 정답이 없는 학문입니다.

배우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가르치는 사람도 답이 없습니다.

따라서 인문학 교육은 수평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가르치는 사람은 배우는 사람이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게 하고,

배우는 사람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을 일깨워줄 뿐입니다.

인문학 강의에서 끊임없이 묻고 답하는 대화가 필요한 이유입니다.(277)

 

소크라테스를 비롯하여, 논어, 맹자 등의 많은 책들이 다 '대화'로 이루어진 이유를 이야기하면서,

인문학의 위상까지 다룬다.

그렇다.

강신주가 장거리에 철학을 들고 나와 팔고 있으면, 사람들은 자꾸 묻는다.

정답을 원한다. '상담'은 원래 상담원이 답을 갖고 있지 않다.

내담자가 자기 문제를 잘 살펴볼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상담원이고,

삶에 정답이란 애초에 있지 않다.

강신주가 '선생' 자리를 박차고 다상담을 그만둔 이유도 같은 것이겠다.

 

책 안에 적은 낙서 구절도 재미있는 살필거리다.

 

아내를 얻는데 중매가 없다고 한탄하지 마라.     娶妻莫恨無媒人

책 속에 옥같은 용모의 여인이 있으니...            書中女有顔如玉 (294)

 

고문진보에 실린 권학가라고 한다.

서경의 하은주 3대에 대한 풀이도 읽을만 하다.

 

이상사회는 완전한 사회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불완전합니다.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한 사회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결국 이상사회는 꿈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하,은,주 삼대가 이상사회로 여겨지는 이유는

그 시대가 완벽했던 사회였기 때문이 아니라

이상사회의 꿈을 잃지 않은 시대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삼대의 역사는 아무런 희망도 미래도 찾기 힘든 상황에서

그 짧은 꿈같은 시절로 회귀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의 의지와 노력으로 일궈졌습니다.

이상사회를 향한 비현실적인 꿈을 꾸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사회,

그것이 현실적인 이상사회의 모습이 아닐까요.(301)

 

인문학이 필요함을 이렇게 강조하는 일도 쉽지 않다.

사서 삼경이라는 고루해 보이는 책들 안에서, 이런 뜻을 읽어 낸다면, 그야말로 온고이지신...이 아니랴.

쓰레기같은 '옛것'들에서 청출어람의 혁명을 얻는 것이 인문학의 정신이 아니랴.

 

필자도 한때 스스로를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사람이라도 몇 번 실패를 겪고 보면

자기도 이 세상에 넘쳐나는 평범한 존재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마련.

저 방구석에 쌓여있는 쓰레기 고서처럼,

필자 역시 평범하기 그지없는 존재임을 자각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에필로그)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는 '인생의 회전목마'라는 곡이 등장한다.

인생은... 글쎄. 빠른 박자로 진행될 때도 있고, 평범한 속도로 흐를 때도 있다.

회전목마처럼 뱅글뱅글 도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무심하게 보면 쓰레기처럼 보이는 것들,

그것들도 애정담긴 눈으로 보면 반짝반짝 빛내며 손길을 기다리는 존재일지 모른다.

그 손길에서 향기와 기운이 생동하게 되는 것이라면,

필자의 문자향 서권기의 작업은 이만하면 성공이다.

 

꼼꼼히 살피진 않았지만, 한자도 틀린 곳이 거의 없다.

요즘 이렇게 편집 상태가 좋은 책 만나기 쉽지 않다.

이런 사람도 있어 주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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