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껌
위기철 지음 / 청년사 / 2005년 1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읽으며, 위기철의 상상력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다만 베르나르의 그것은 발랄하기 그지없는데 반해, 위기철의 그것은 음울하고 비참한 그것이다.
80년대를 살아온, 이제 사십대가 되어버린, 육십년대 생들의 삼팔육 세대들이 가슴을 치며 살았던 지난 날들에 대한 이야기다.
위기철은 대단한 능력을 가진 작가라고 생각해 왔다. 그의 짧은 글들을 읽으면서 위기철이란 사람이 언젠가는 큰 작품을 쓸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많은데, 그의 <아홉 살 인생>은 왠지 위기철이 아닌 것 같은 생각을 하게 했던 기억이 난다. 실망감이었을까.
그러던 중, 이 책을, 우연히 도서관에서 잡은 이 책이 단지 위기철의 소설이기 때문에 읽었던 이 책이, 위기철의 능력을, 내가 믿었던 그의 능력을 다시 확인할 수 있게 해 준다.
이제는 잊혀진 계절이 되어 버린 80년대의 삶에 대하여, 그 피비린내 진동하던 <죽음의 굿판>에 대하여, 이룰 수 없는 꿈에 대하여, 그 당시 주먹 불끈 쥐던 학생회장들이 <한나라당>에 들어가 버린 이 잊혀진 시대에 대하여, 대기업 직원이 되고, 교수가 된 시대에 대하여 위기철은 아직도 쓰고 있다.
잃어버린 것은 추억할 수 있지만, 잊어버린 것은 어쩔 수도 없음의 절박함을 그는 안다. 그래서 이 글들을 썼고, 다시 묶어내었다고 본다.
그의 껌을 발랄하다. 우리 삶에서 행복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달려가게 되는 이십대 후반부터의 삶을 그는 바라본다. 십대까지의 희망과 꿈과 미래를 실현시킬 아무런 능력도 제도적 장치도 갖지 못한 우리 세대들이 무작정 내달려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서면, 거울 앞에서만 만날 수 있는 나의 <코>로 우뚝 서 있는 <나>. 그런 나를 바라보게 한다.
이 소설은 자아 성찰이며, 이 사회의 성찰이다. 80년대의 투쟁과 90년대의 우울을 잊고 살려고 하는, 그러면서도 7080 콘써트에서 대학 가요제 노래를 들으며 그 신산하던 시절에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던 것을 잊고 그저 그 꿈이라도 꿀 수 있었던 시절에 대하여 회상하려고 하는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픈> 것을 알고 있는 세대들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날카로운 목소리다.
물론 이 작품들은 최근에 쓰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지나간 십 년의 세월 속에 녹슬어간 우리의, 나의 양심과 정의가 이 작은 껌 속에 들러붙어 있다.
어제 도서관에서 우연히 광주의 이십 오년 전 모습이 그대로 담긴 화보를 한참 보다가 왔다. 그 주검들, 그 죽음의 상황들이 망막에서, 뇌리에서 채 지워지기도 전에 껌을 읽은 것은, 정말 우연이란 세상에 없다는 걸 깨닫게 한다. 그 사진들은 바로 이 그림없는 소설의 삽화들이었던 것이다. 하느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