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입시에서 차지하는 논술고사의 비중이 커지면서 글쓰기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졌다. 사고력을 넓히는 방안으로 어지간히 뿌리를 내려 다행스러운데,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놓고 머리를 싸맬 걸 생각하면 마음이 좀 짠하다. 일상적으로 머리를 싸매는 내 직업에 비추어 그 사정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생 동안 글로 밥을 벌었으면 최소한 겁은 먹지 말아야 하거늘 번번이 떤다. 엄살을 넘어 갈수록 어렵다. 더구나 우리 또래는 종이에 쓰고 PC 자판을 치는 두 세계를 사는 까닭에 날로 새로운 IT 언어에도 정도껏 신경을 써야 한다. 생물이나 다름없는 말의 현대성 확보를 위해 불가피하다. 그렇다면 논술 공부를 하는 학생들은 체질화된 자기네 언어를 접고 기성세대의 관용어에 더 많이 머리를 쓰는 셈인가.

<글쓰기, 무슨 생각을 어떻게 정리하느냐가 중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종이에 찍힌 재래의 숙어와 인터넷에 나도는 말이 피차 뜨악하고 낯선 건 사실이지만, 중간에 통역을 세워야할 지경으로 언로가 막힌 형국은 아니다. 무슨 생각을 어떻게 정리하느냐가 한층 중요하다. 작은 예문을 든다.

산 날망에 앉아 양지녘 고샅을 바라보며 눈물 훔친다.

바탕 화면의 익스플로라에 커서를 가져가 클릭하는 내 손가락...

어떤 싯귀(詩句)와 산문의 대비인데, 날망, 양지녘, 고샅은 순수한 우리 말이다. 익스풀로라, 커서, 클릭은 인터넷 용어다. 짧은 묘사속에 글을 지은 이의 나이가 벌써 넘나든다. 후자는 곧 ‘저놔’(전화) ‘어이엄다’(어이없다) ‘ㄱㅅ’(감사합니다)로 튈지도 모른다. 문법 파괴, 세대 단절을 걱정하게 만들거늘, 그런 시기가 오래 갈 리 만무다. 그랬다가는 ‘셤’(시험)에 붙기도 전에 먹통 대접을 받을 것이므로, 때가 되면 저절로 가라앉을 ‘끼’로 돌려도 될 게다.

과도한 이분법으로 세대를 가른 지난날의 경험으로 감히 낙관하거니와, 나이가 어리거나 젊을수록 언행이 생급스럽다는 발상 또한 문제다. 아이들이 없으면 웃을 일이 없다는 속담은 그들의 순진한 마음을 두고 하는 소리거늘, 때로는 그것이 사물의 본성을 귀엽게 일깨우기도 한다. 그런 보기를 최근의 한겨레신문에서 읽었다.

크레파스나 물감의 색깔 표현 가운데 하나인 ‘살색’을 아홉 살에서 열네 살짜리 소녀들 여섯이 ‘살구색’으로 바꿨다는 기사가 그거다.
“우리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니 신기하다”는 녀석들의 탄성이 환히 웃는 사진과 함께 빛났다. 그 동안의 곡절이 제법 길다.
살색은 황인종인 한국 사람의 피부색을 뜻하는 것으로, 피부색이 다른 외국인에게 인종차별의 의미로 오해될 수 있어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4년 전에 이미 나왔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대부 격인 김해성 목사가 제기한 것이다. 그로부터 1년 후, 산업자원부 산하 기술표준원은 그 제의를 받아들여 ‘연주황’으로 고쳤다. 그러자 중학교 2학년인 김민하양 자매(김 목사 딸)와 친구들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냈다. “주황색은 지나치게 어려운 한자어다. 이는 크레파스나 물감을 자주 쓰는 어린이에 대한 또 다른 차별이자 인권침해이므로, 알기 쉬운 살구색으로 바꿔 달라”고 말이다.

소녀들의 ‘당돌한’ 소청도 재미있지만 그걸 ‘호락호락’ 들어준 관청의 유연한 자세 역시 예전과는 엄청 다르구나 느꼈다. 아이가 무심코 던진 돌이 개구리에겐 치명적일 수도 있는 것처럼, 기왕의 ‘살색’이 동남아에서 온 노동자들에겐 차별을 표징하는 말일 수도 있겠다는 걸 확인하는 아침이었다.

<섬세한 색깔 감각, 세상을 바꿀 수도>

색깔 이름(KS)을 정하는 부서가 따로 있다는 사실에 혹해서 찾아간 기술표준원의 홈페이지에 따르면, 지금 사용 중인 색 이름이 천여 개나 된다. 명색 글장이를 자처하는 내가 아는 색명은 그중 얼마나 될까. 부끄러운 가운데, 본래 이름과 동식물 등의 이름을 함께 쓰도록 한 것이 많아 반가웠다. 노란색은 병아리색, 초록색은 수박색, 진한 빨강은 루비색 따위로 폭을 넓혔다.

우리의 자랑 황우석 교수는 줄기세포 추출과 젓가락 민족의 손재간을 잠깐 언급한 적이 있거니와, 색깔에 대한 섬세한 감각 또한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운해 할 정도다. 그런 안목으로 우리는 다시 무엇을 이루어 세상을 들었다 놓을까. 아무려나 ‘색깔론’ 갈등은 질색이다. 더 이상 그런 일로 소모적인 입방아를 찧지 않는, 잘난 사회를 열어가고 싶다.

글쓴이 / 최일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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