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1995년 4월
평점 :
품절


밀란 쿤데라의 소설은 일반 소설과 다르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조잡하고 싸구려 같은 이야기들 속에서,

인간의 본성은 드러나게 되는데, 이걸 재미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저질스럽다 해야할지, 생각하게 된다.

 

그의 소설은 ' 플롯이 잘 짜여진'도 아니고, '스토리가 감동적인'도 아니다.

사실, 소설의 일반적 기대감과는 다른 글을 그에게서 만나게 된다.

거기서 만나는 것은 인간의 본 모습에 대한 '키치'적 표출이다.

 

귀족의 멋진 체하는 삶이나, 지식인의 잘난 체하는 삶이나 그에게 비루하게 비치긴 마찬가지다.

한때 '엽기'란 이름으로 온갖 동영상이 떠돌았다.

구토하는 장면이나 여자의 소변 장면, 똥구멍(이 책의 용어로)에서 쏟아지는 배설물~

이런 것을 여과없이 찍어서 인터넷으로 공유하는 것이었는데,

밀란 쿤데라가 봤다면 ㅋㅋ 거리면서 웃었을지 모르겠다.

 

인간은 참 부족하기 그지없는 존재다.

그런데도 귀족입네, 지식인입네 하면서 폼을 잡는 게 인생들이다.

 

이 책의 멋진 구절.

 

느림과 기억 사이.

빠름과 망각 사이에는 어떤 내밀한 관계가 있다.

지극히 평범한 상황 하나를 상기해 보자.

뭔가를 회상하고자 하는데, 기억이 나지않는 경우, 기계적으로 그는 발걸음을 늦춘다.

반면, 어떤 끔찍한 일을 잊어버리고자 하는 자는,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빨리 한다.

실존 수학에서 이 체험은 두 개의 기본 방정식 형태를 갖는다.

느림의 정도는 기억의 강도에 정비례하고, 빠름의 정도는 망각의 강도에 정비례한다.(48)

 

삶에서 중요한 요소는 속도가 아니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는 밀도다.

부정적 밀도는 겪으면 트라우마로 남고, 긍정적 밀도가 쌓인 시간은 사랑으로 남는다.

연애하는 기간이나 아기를 기르는 기간이 짙은 기억의 밀도를 드리우는 게다.

 

그런데 시대가 인간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다.

우리 시대는 과연 어떠한가.

 

우리 시대는 망각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으며,

이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속도의 악마에 탐닉한다.

발걸음이 빨라지는 이유는

사람들이 자신을 기억해주길 이제 더이상 바라지 않음을,

자신에게 지쳤고, 자신을 역겨워하고 있으며,

스스로 기억의 그 간들거리는 그 작은 불꽃을 훅 불어 꺼버리고 싶음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고 싶어서다.(158)

 

이 책 속의 한 에피소드로,

연설회 시간에 주어진 자신의 논문은 한 자도 발표하지 못하고,

자신의 처지만 밝히고 돌아선 체코 학자가 등장한다.

 

삶에서 해야할 것들을 쏙 빼먹고,

불필요한 철자법 따위에나 골몰하던 그가 무척이나 비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이지만,

실상 삶이란 다들 '가장 중요한 것들은 쏙 빼먹고' 엉뚱한 욕망의 노리개가 되기 쉬운 것 아닌지...

 

우리는 쾌락 안에서 쾌락을 위해 살 수 있으며 행복할 수 있는가?

쾌락주의의 이상은 실현 가능한가?

그 희망은 존재하고 있는가?

적어도, 그 희망의 여린 빛이나마 존재하고 있는가?(167)

 

밀란 쿤데라의 글은, 마치 여행과도 같다.

이미 가본 곳을 나이들어 다시 가보면, 생소한 느낌이 들기도 하는 그런 여행.

 

인간은 쾌락을 위해 살 수 있는 것인지, 자본주의에 침윤되어 살아가는 이 순간,

나의 쾌락은, 수많은 <이노베이션>은 과연 누구를 위한 여린 빛인지...

돌아보게 하는 짧고 우스꽝스럽지만 묵직한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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