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외국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진욱 옮김 / 문학사상사 / 199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올 여름에 이 책이 '이윽고 슬픈 외국어'라고 번역되어 나왔더라만,

나한테 있는 옛날 책을 다시 읽었다.

한창 하루키가 한국에서 번역되던 무렵.

그의 이 수필집을 사놓고, 부분부분 읽었던 것 같기도 하고... 마라톤 이야기를 읽은 것 같기도 하고...

 

그가 학생들을 가르친 이야기는 신선하다.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될까, 내게는 어떤 가능성이 있는 걸까에 대한 불안...

그들의 불안을 이해할 수 있다.

나도 스무살 때는 불안했었다. 아니, 불안 정도가 아니었다.

지금 여기에 하느님이 오셔서 다시 한번 스무살로 만들어주신다면,

그런 시절은 한 번으로 족하다.

나는 스물아홉살 때, 갑자기 소설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봄날 오후, 진구 야구장에 외야석에 눕다시피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힐튼이 2루타를 쳤고, 그때 갑자기

'맞아, 소설을 쓰는 거야.' 하고 생각했다고...(209)

 

하루키의 이야기는 물론 듣는 이에게 '뭐야?' 이런 감정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지만,

그의 불안을 이해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가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 지금같은 작가가 되어있으리라고 생각하기 힘들었을 것이고.

 

비록 지금은 잘 쓸 수 없다고 하더라도,

무엇인가를 쓸 수 있는 시기는 반드시 온다고 생각해.

그때까지는 현실의 경험을 벽돌을 쌓아올리듯 하나하나 소중하게 쌓아가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213)

 

진솔하다.

그는 별 직업없이 재즈바를 운영하면서 겨우 살아온 시간도 오래다.

재즈를 듣기 좋아해서 재즈바를 운영하는 사람은,

술꾼이 술집을 운영하는 것과 같을 거다.

다만, 술꾼 중에도 멋진 시인이 될 수 있는 사람도 있고, 그냥 알콜중독자로 마치는 사람도 있듯,

재즈를 듣다가 말아먹는 사람도 있지만, 그의 글 속에서 늘 울려퍼지는 '긁히는 소리'에 대한 사랑이

독자에게 울림을 주는 재료가 될 수도 있는 거다.

 

그의 달리기도 그렇다.

42킬로미터를 달리는 일은, 단조롭기 그지없는 것이 아니란다.

 

설령 짧게밖에 살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짧은 인생을 어떻게든 완전히 집중해서 살기 위해 달리는 것.(87)

 

그래. 우리 인생은 참으로 따분하고 기억나지 않는 날들의 연속으로 이어져 간다.

그 안에, 완전히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마라톤의 시간은,

자신의 호흡과 자신의 투쟁이라는 매력이 있을 것이다.

 

재즈는 호흡을 있는 그대로 느끼게 한다.

들숨과 날숨이 모든 조음 기관과 마찰을 일으켜 투쟁의 현장으로 불러 일으킨다.

그 끈적거리는 소리는 듣는 이를 기분나쁘게 하기도 하는데,

재즈의 숨소리와 유사한 섹소폰 소리의 거친 마찰음도 삶을 오롯이 긁어댄다.

그 긁힘의 매력에 빠지면,

맑은 음성보다 거친 숨소리에 담긴 삶에 대하여 마음으로 받아들일 자세를 배우게 되는데,

그가 재즈 카페를 운영하면서 익힌 그런 거친 삶에 대한 나름의 받아들임이

재즈를 통해 울려퍼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빗방울이 달리는 차창을 요란스레 두드려대는 그런 소리와 재즈는 어울린다.

고요한 심사보다는 온갖 갈등이 머릿속을 긁어댈 때랑 재즈는 어울린다.

그렇게 재즈를 들으면서,

삶의 부조리를 말로 표현하는 일은 더욱 어려울 때,

그는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를 구사하는 세계에서 살아가면서,

조각난 말보다는 원색적인 음으로서의 재즈가 삶의 양태를 더 유사하게 보여준단 걸 귀로 온몸으로 깨달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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