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치 - 2013 제37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이재찬 지음 / 민음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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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이나 은희경의 '징징대고 궁상맞은' 소설들이 좋다는 사람들이 많다.

요즘 작품들은 시니컬하고 시크한 것이 별로라고...

뭐, 나도 그런 사람이다. ㅋ~

 

그렇지만, 일본의 하루키처럼

전쟁이나 식민지의 삶을 겪어온 사람들이 징징대는 이야기를 오래오래 들어온 세대는

그 궁상에서 벗어나고 싶을는지도 모른다.

 

징징대고 궁상맞은 사고가 오래 지속되면 '한'이 된다는데, 그것이 몸에 밴다.

향을 오래 싸고 있는 종이처럼,

비린내나는 생성을 오래 묶고 있던 새끼줄처럼...

그런 것을 <정서>라고 한다.

 

이 작가는 새로운 <정서>를 보여준다.

일단 이 소설은 금세 읽힌다.

범죄가 나오지만 추리소설은 아니다.

스릴은 있지만 결과는 열려있다.

학생이 주인공이지만 청소년 소설도 아니다.

 

기성 세대의 세태를 풍자하지만,

탄탄한 이야기가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든>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청소년이라는 것이 부끄럽고 불쌍하다.

그러나, 이 소설을 감싸안고 눈물흘릴 줄 아는 양심이 있다면,

이 사회는 아직 어둡지만은 않다.

 

엄마도 방법이 없어서 방 변호사와 결혼하지 않았을까?

방법이 있었다면 자신의 삶을 살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좀 우아해졌을지도 모른다.(43)

 

그래.

어른들의 삶도,

그렇게 살고 싶어서 그렇게 사는 게 아니다.

방법이 없어서... 지금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넌 꿈이 뭐니?'라고 묻는 어른이라고 해서,

어렸을 적의 꿈을 실현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걸 이 소설은 돌아보게 해준다.

이 소설을 읽고 '파렴치한 패륜'이라고 떠든다면 ㅋ~

그건 아직도 성리학적 질서에 얽매인 '소학'이나 읽어야 할 사람인 게다.

 

엄마는 1년에 360일 가량 빠지지 않고 피트니스에 다닌다.

몸매 관리는 SKY감이다.

몸의 피하지방은 잘 태워 없애면서 감정의 지방질은 오히려 늘어나기만 한다.

난 엄마의 가장된 흐느낌을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가짜니까.(105)

 

한국의 '아줌마'들이 '속물적'으로 하는 일을 홀라당 벗겼다.

가짜의 삶.

감정의 지방질에는 무관심하면서, 외모의 지방질에만 관심있는,

그걸 가짜라고 부르니 뜨끔하다.

 

니가 살인자라 부모를 죽인 걸까?

아니면, 부모가 널 살인자로 만든 걸까?(149)

 

이 소설의 기본 사건은 살인사건이지만,

그 사건으로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사회'다.

기본이 없는 사회. 되는대로 사는 사회.

공적 개념이 없이, 사적 사유만 가득한 '소유 중심의 사회'

 

깊은 곳에 저장된 자신감이 옛날 옛적에는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그 시선 속의 직유가 깊이 침범해

내 자존감을 조금씩 갉아 냈다.

성교육 시간에 본 낙태 동영상에서 태아를 긁어낸 것처럼,

아이가 기계를 피해 도망가득 내 자존감도 달아나려 안달했다.

이젠 더이상 도피하지 않아도 된다.

내 자존감은 내 안에 있는 거지 사람들이 볼 수 있거나

그들에게 보여주는 게 아니란 걸,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깨달았다.(187)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이 소설의 '존속 살해'는 알레고리다.

독립해야 자존감을 살린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강한 비유다.

제발, 패륜 운운하지 말았으면 한다.

부모의 마음에서 자식을 죽이고,

자식의 마음에서 부모를 죽여야,

그래서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던 이도 있듯,'

독립이 시작된다.

 

부모를 죽인 뒤, 편안해진 아이를 과외 선생이 만난다.

 

과외는 계속 나를 본다.

괜찮으면 안 된다는 듯.

그전엔 괜찮지 않았는데 이제야 괜찮아졌다고 말해줄 수도 없고,

그냥 손 한 번 흔들고 출발한다.

말해 준다고 해도 SKY 따위가 알아듣지도 못할 거다.(236)

 

물론 이 소설은 황당무계한 소설이다.

살인이 그렇게 쉽게 정당화되지도 않고,

살인 이후 마음이 편할 리도 없다.

그러니, 이 소설은 '학생'과 '부모'를 알레고리로 넣은 '우화'로 읽혔으면 한다.

 

해리포터가 9와 1/2 승강장으로 들어가듯,

이 소설은 자연스럽게 이 땅에 고착된 질서가 '가짜'라는 것을 금세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픽션 속에서라도 상상력이 번져가노라면,

하루키처럼 '돌출된 세대'(단카이 세대)라고 일컬어지는 새로운 생각을 하는 세대가

찬찬히 자리잡게 될 것이다.

 

이재찬, 기억해 둘 법한 이름이다.

건필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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