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의 기독교 - 환상의 미래와 예수의 희망
김영민 지음 / 글항아리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예수님,

한 삼십 여년 전에 여기 한번 다녀 가셨을 겝니다.

너무도 가슴이 터지도록 아파서 다들 비명을 지르고 그러다가 넋이 나갔던 그 시절,

예수님이 오지 않았을 리 없지요.

 

밤이 되면 도로는 브레이크등으로 붉게 강물을 이루고,

주택가 곳곳에서 예수님이 참으로 넓은 팔을 벌리고 오셨지요.

삼십 년 전 광주에서도...

교회들이 문을 꼭꼭 걸어잠그고...

평화의 사도들이 아마도 길거리에 김밥 나눠주러 나와서 교회를 꼭꼭 걸어 잠갔을 터입니다만,

그 거리에서 예수님도 같이 피흘리셨을 겝니다.

 

이 나라의 교회들은 이제 문을 활짝 열고 '시주함'을 활짝 펼쳤습니다.

아, 교회는 '시주'가 아닌가요?

뭐, 중놈들 배불리던 시주나, 문닫아 걸고 숨었던 그자식들 처먹는 '헌금'이나, 그게 그거 아닙니까?

 

상인 자본주의와 개신교 정신 사이의 친화성은 구원적이었고(16)

 

그래요.

그렇게 시작된 개신교였는데,

어쩌다 이땅에 오셔서 그렇게 친자본적, 친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착실히도 젖어 들었는지요.

 

B는 동시대 수많은 장삼이사처럼 워낙 불교 신도인듯하게 살아왔다.

여성에게 우호적으로 재생산될 수 있는 곳으로 그 당시 빈발하고 있던 교회라는 기이한 장소가 한결 평했다.

교회당은 일부 소외된 도시인들에게 새로운 장소적 가능성을 현시했던 것이다.

물론 거기서도 설교라는 언어적 치유의 매개가 외로운 심금을 치고 있었던 사실...

여자들의 (살이 아닌) 말에 도통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회에서...(27)

 

그렇죠.

이 땅에선 빨갱이가 아니려면,

군인가족, 경찰가족, 그도 아니라면, 교회라도 다녀야 했던 겁니다.

 

폭력적이거나 무능한 부모와 변덕스러운 남편 대신 '전지전능한 사랑의 신'...으로서의 교회(31)

 

아, 이 땅의 교회는 참으로 다양한 역할을 하여왔던 모양입니다.

 

불행과 고독을 위로하는 낭만적 슬픔의 장소... 이자,

어린 우리에게 그곳은 잠시나마 가난이라는 현실을 잊고 남의 땅에서 벌어진 만화경적 고사에 취하는 환상의 자리...(95)

로서의 교회는 이제 바뀌었습니다.

교회에서도 돈이 있어야 대접받아.(96)

그렇군요.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은 자기에게 타락한 현대사회의 치료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들은 자기가 치료하는 척하는 그 질병의 증상이다.(110)

 

군대간 아들이 주말마다 천주교회를 꼬박꼬박 갔답디다.

주님의 은총으로 초코 과자와 콜라를 영접받았다더군요.

이제 자대배치받고 아직도 가냐고 그랬더니, 축구한다더군요.

훈련소에서나 그 핍박을 피하는 곳으로, 먹을 것과 잠잘 곳을 제공하는 곳으로 기능하는 예수님의 처소가,

참으로 안쓰럽습니다.

 

예수님,

이 땅에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과연 무엇을 합데까?

명박스럽게 자신의 재산이 늘어나고, 차근차근 축적되길 간절히 기도드리옵디까?

가난한 사람들은 취업을, 진학을, 사업을 그렇게 기도합디까?

 

물도 썪도록 강을 파헤쳐 돈을 벌었고,

원자력 발전소에 부정한 부품을 주고받아 돈을 벌었고,

온갖 공기업의 임원이 되어 엄청난 돈을 벌었던 고위층들이,

교회에 가서 도대체 무엇을 빌었는지 예수님 잘 아십니까?

 

나는 종교의 완성 - 종교는 결국 믿는 자의 일생에 근거한

한시성과 실존성에 제한적으로 유효하므로 완성이라는 말 그자체에 어폐가 있긴 하지만, -

이 어떤 정서와 분위기에 젖어있는 생활 양식,

그리고 그 생활 양식에 의해 검질기게 몸을 끄-을-고 다가서려는 어떤 희망에 의해서만 가능해지리라고 전망한다.(132)

 

이 책의 지은이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종교란 것은 교회에 있지 않고,

그 종교를 믿는 자의 삶에, 그 몸으로 증거하여야 하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이제 이 교회많은 나라에 오셔서,

저 교회들은

그 교회의 기독교는 나 '기독(크리스트)'의 이름을 빙자한 삿된 무리들의 거처라고 알려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가 있었으니 '기독교'가 필요치 않으나,

굳이 기독교인으로 남고자 하면 결국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에 불과한 신자가 아니라,

제자의 길, 그러니까 어렵사리 몸을 끄-을-고 남을 따르려는 삶의 양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제자란 '차자성의 소실점을 향해 몸을 끄을고 다가서는 검질기고도 슬금한 노력입니다.

쉽게, 자기 십자가를 지기로 고쳐 말할 수도 있겠군요.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제자는 촛농의 힘에 의지한 이카루스처럼 어렵고,

신자는 쓰레기통의 파리처럼 번성합니다.

이제 신자의 파리떼와 그 파리대왕들의 틈 속에서 유일한 가능성은 '제자'이지만,

예수처럼, 다만 불가능한 꿈을 지피면서

걷고 걷다가, 죽어버리십시오.(머리말에서, 5)

 

예수님,

예수님의 신자들만 이렇게 부패하고 나태하겠습니까.

세상이 그렇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걸어가셨던,

그 고난의 길이 앞으로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어서,

예수님께서

부디 같이 걸어 주시라고...

몇 마디 당부를 적습니다.

 

아멘...

 

 

 

 

 

 

 


댓글(1)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오기 2013-10-21 0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나한테 교회다녀야 한다고 열정을 바쳐 강요하던 선생님께 내가 했던 말이 여기 써 있네요.ㅋㅋ
우리 아들은 기독교, 천주교, 불교 두루 섭렵했는데, 요즘은 어쩌는지 휴가오면 물어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