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휘어진 그래서 지키는 - 이권우의 책읽기와 세상읽기
이권우 지음 / 황금비율 / 2013년 6월
평점 :
절판


정민 선생의 '한시 미학 산책'이란 책에서 들은 이야기 같은데,

동양화의 미덕은 그리지 않고 그리기라고 한다.

'화제'라고 해서 그림의 주제를 직접 그린 것은 '여백의 미'가 없고, '상상의 멋'을 부릴 수 없어 하품으로 친다.

꽃밭을 달려와 발굽 가득 꽃향기가 묻은 말이 달리는 것을 그리랬더니,

대부분 꽃과 말을 그리고 말았는데,

그리지 않고 그리기의 대가는,

달려가는 말의 발굽 주변 가득, 나비들을 그려 넣었단다.

 

책을 읽는 것은, 책이 특별한 '교환가치'를 가져서가 아니다.

책이 '교환 가치'를 가지는 것은, '입시 문제집' 같은 것일 터다.

어른들이 주로 '책을 읽어라',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을 하는데,

그것은 책을 공부해서 출세하고 돈 벌라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돌아가던 개미가 구멍 찾기 어렵겠고

돌아오는 새는 둥지 찾기 쉽겠구나.

복도에 가득해도 스님네는 싫어 않고

하나로도 속객은 많다고 싫어하네.

 

이런 시의 주제를 생각해 보라 하면 재미있는 수업이 된다.

그리지 않고 그렸고, 말하지 않고 말한 셈이 되니 말이다.

그리고 이런 보이지 않는 그림을 주고받음을 통하여,

세상 만사란 이처럼,

한 가지로만 답할 순 없는 것이란 이야기도 유추할 수 있으니, 그런 것이 문학을 읽는 힘일 것이다.

 

무엇을 읽을까, 왜 읽는가...

이런 물음에 대한 대답은 십인십색이고, 정답은 없다.

그래서 다들 지껄이는데, 대부분 본질을 에두르다 마친다.

격화소양... 신발을 신고 무좀 근지르기다.

 

이권우의 리뷰집은, 참 매력적이다.

나도 리뷰를 이천 편 넘게 기록하고 있지만, 내 리뷰는 자족적인 것인 반면,

팔리는 리뷰를 염두에 두고 쓴 사람들의 글 역시, 매력적인 것들이 흔치 않다.

그런데 이권우의 이 책은 멋지다. 이렇게 멋진 리뷰를 쓰고 싶다가도,

언감생심... ㅋ~ 어찌 감히 마음을 내랴... 니 주제를 알 지어다. 이랬다.

 

우리를 둘러싼 허구를 거두어 내고 진실을 엿보려면 꼼꼼하게 읽어야 하고

비교하며 읽어야 하며,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야겠다.(20)

 

일연과 김부식에 대한 책의 리뷰 말미에 있는 말인데, 참 이 책 읽으면서 책이 고팠다.

콕 박혀서 책만 읽을 수 있는 삶을 꿈꾸는 독서였다.

많은 리뷰들이(내 리뷰는 거의 그렇고 ㅋ~) 감상적이고 중심을 놓치기 쉬운데,

그의 글은 연륜이 묻어나는... 중심잡기에 도전한다. 멋있다.

 

이제 나이가 드는 것일까.

극단으로 흐르는 이들의 선동에 동의하지 않게 된다.

거기에 숨어 있는 권력욕에 넌더리를 친다.

오래 걸리더라도 스스로 발견한 진실이 아니면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114)

 

그렇지만, 중립의 그네를 타고 멍청하게 무료하게 흔들리고 있는 멍충이처럼 살진 않는다.

날카롭게 지적할 부분에선 매서웁다.

 

이런 유의 책들이 그러하듯 체제의 모순에 대한 성찰이나 근본적 개혁안은 찾아볼 수 없다.

책을 읽고 나서도 여전히 갈증이 가시지 않는 까닭이다.(130)

 

그가 읽고 쓰는 이유에 나도 공감한다.

나는 그저 읽고 쓰는 것이 행복한 남자~라는 타이틀을 이제 좀 버릴 때가 되었나보다.

 

책을 읽고 나면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느낌보다는 고민할 거리가 많아졌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본디 좋은 책은 그러는 법이다.(175)

 

좋은 책을 읽고 좋은 글을 쓰는 것에 행복해해야 할 나이다.

이제 좋은 책만 읽기에도 나이가 적지 않다.

 

이 책을 읽으면서 혼자서 ㅋㅋ 거리면서 고개를 주억거리기를 넘어, 완전 공감~! 하면서 읽은 글이 있다.

나도 혼자서 '불혹'을 '삿된 마음에 혹하지 않는다,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는 해석보다는,

남자 나이 마흔이면, 여자를 봐도 혹하지 않는다~ 속된 말로 서지도 않는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더랬다.

내가 나이 마흔이어서 신체의 약화를 경험하기도 했지만,(요즘이야 마흔에 발기 부전이 흔히 오진 않지만)

공자의 시대엔 마흔이면 당연히 발기 부전이기도 했으리라.

맹자의 호연지기를 읽으면서 '우쩍일어날 발 勃'자를 쓰는 '발기'를 이야기하는 부분은 참 재밌다.

이제 비*그라니 씨*리스 같은 약들이 마흔의 '불혹'역시 '부록'으로 치부하는 시절이 온 셈인데,

호연지기는 기르지 못한 채로, 거시기만 우쩍 일어나는 시대는 참 저속하고 속된 세상이다.

 

호연지기를 기르는 등산 모임은 대부분 길을 잘못 들어(誤入) 가기 십상이라 하니,

요즘 휴게소에 가면 쿵작거리며 가장 흔히 들리는 음악이,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걸~" 이며, 그 주변에 불콰한 중년들이 흔들고 있는 등산복 차림이,

왠지 내 나이가 어떤지 묻지도 말라는 느낌표~!인듯하여 씁쓸하다.

 

가을이 되면 낙엽이 져야 한다.

아까, 저 위의 한시의 답이 그것이다.

주역이 설명한 원형이정의 원리에 따라,

시작의 봄이 있으면, 만사형통의 여름이 있고, 수익을 얻는 가을을 거치면, 정리하는 겨울을 맞아야 한다.

정리하는 겨울을 맞아야 할 시절에,

하염없이 '우쩍일어날 발'을 위하여 비아그라를 들이키는 시대상을 보면,

어찌 우쩍일어나야 할 '정신'에 대하여는 이토록 가난한 나라가 되었나... 싶어 서글퍼진다.

 

아끼면 아낄수록 시간의 압박은 더 강해집니다.

시간 관리는 포기하고,

시간을 유용하게 사용하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시간은 절약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여유로운 시간을 통해서만 우리는 시간을 다시 얻을 수 있습니다.(268)

 

제자들이,

동료들이,

자주 묻는다.

"선생님, 어떤 책을 읽는 것이 좋을까요?"

정답은, 니 수준에 맞는 책. 이다.

그렇다면? 자기 수준에 맞는 책은?

대학생 정도 수준이라면, 이권우도 하나의 대안이 되지 않을까 싶다.

 

고종석의 책, '여자들' 이나,

성수선의 책, '혼자인 내가 혼자인 너에게' 같은 책.

정여울의 '소설 읽는 시간'이나,

왕은철의 '애도 예찬', 그리고 로쟈의 책들도 독서의 길을 열어주는 친구들이 될 수 있겠다.

 

읽는 일은 삶을 돌아보는 일이고,

삶의 시간을 윤택하게 하는 일이다.

 

삶에 시간은 펼쳐져 있으나, 그 끝을 알 수 없다.

언제까지나 펼쳐져있을 것 같은 시간들은, 역시 끝이 있다.

 

자, 나에게 주어진 시간들 속에,

어떤 책을 펼칠 것인가.

행복한 고민이다.

 

----------- 고칠 곳 두 군데

116. 아드리아네의 실... 오타다. 테세우스란 군자호구 요조숙녀의 이름은 아리아드네이다.

346. 생때같은 아들을... 무덤 주변에 '흙째로 떠다 심은 잔디'를 이르는 말이 '떼, 뗏장'이다. 생떼는 살아있는 잔디처럼 질긴 목숨을 뜻할 때 자주 쓰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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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3-10-17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군요~ 장바구니에 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