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순간의 인문학
한귀은 지음 / 한빛비즈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십여 명이 모이는 어떤 모임에서 딱 한 번 한귀은 선생을 본 적이 있다.

그나 나나 그 모임의 핵심 멤버는 아니고, 그저 숟가락 얹는 수준이어서 말 한 마디 나눌 일도 없었지만,

조여정처럼 생긴 예쁘고 참한 얼굴인데, 싱그런 젊음이 아니라 찌든 삶의 짠함이 묻어나는 모습이었다.

 

이 책을 읽노라니, 그의 짠한 마음이 그득 묻어난다.

그 날들을 이렇게 읽고, 보고 쓰면서 살아 왔으리라.

이렇게 인문학이 그의 힘든 날들을 겨우 지탱하는 줄기가 되어 주었으리라... 생각하니 더 짠해진다.

 

그의 사고는 '사랑, 행복, 고독, 상처, 그리고 노년'을 넘나들면서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 중간에는 재밌는 소설 이야기, 영화 이야기, 음악 이야기들이 가득해서 풍요롭다.

이야기는 그렇게 어렵지도 않고, 또 그렇다고 폭 빠지게 매력적이지도 않다.

 

존 레넌의 'Grow old with me' 가사를 인용하는데,

Grow old along with me,

The best is yet to be.

나와 함께 늙어 가자.

최고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으니...

 

나이가 들면 노화되고 퇴화되고

침식되고 약화될 것을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로는 상당히 용감하다.

최고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니... 힘을 준다.

 

그래선가 그의 최근 책은 <가장 좋은 사랑은 아직 오지 않았다>이다.

- 인문고전에서 사랑의 기술을 배워라

 

사노라면,

황인숙 시에서처럼 '어쩌겠니'라든지,

박찬욱 감독처럼 '안됨 말고'라는 말이 힘이 될 날이 분명히 있다.

그렇게 삶은 만만하지 않다.

 

진리란 타인과의 진정한 마주침에서 만들어지는 것.(알랭 바디우, 111)

 

그의 사랑 이야기는 이론적이고, 사변적이고, 장황하면서, 쓰라린 맛이다.

부채표 활명수처럼 톡 쏘면서 속을 시원하게 해주는 맛이라기보다는,

정체 불명의 건강 식품처럼 콕 찝어 몇 단어로 말할 수 없는 오묘하게 불쾌한 맛이랄까...

 

어쩌면, 아직도 그가 '타인과의 진정한 마주침'을 간구하고 있는 존재임을 그렇게 드러낸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욕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그 '무엇' 안에 있다고 여겨지는

'무엇 이상의 어떤 것'에 대한 욕망이다.(자크 라캉, 112)

 

타인과의 진정한 마주침을 욕망하는 자에게,

만남은 피곤하다.

'진정한 마주침' 안에는 '만남' 이상의 어떤 것이 있을 것이라고 간절히 바라는 상태가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을 그닥 신뢰하지 않는 듯 하다.

 

아이를 칭찬하는 일은 그만큼 쉽지 않다.

아이가 한 행동의 약 5%는 칭찬받을 만하다.(118)

 

어휴, 사범대에서 가르친다는 이가. 이렇게 아이에 대하여 비관적으로 생각한다면... 우짜겠노...ㅠㅜ

내 관점은 다르다.

아이를 칭찬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다만, 아이가 한 행동의 약 5% 정도는 늘 야단맞을 행동이어서,

어른들의 눈에는 칭찬받을 95%의 적응행동보다, 눈에 도드라지는 5%의 부적응행동이 크게 보여 혼낼 때가 많아 보인다.

 

잠들어 있는 내 아이의 얼굴을 보며 이렇게 혼잣말을 한다.

이 타자야, 이 알 수 없는 존재야.

내일도 너로 인해 내가 미치겠구나.

그러면서 웃는다.

이 타자때문에 내일도 사는 게 재밌을 거고, 흐뭇할 거고,

이 타자에게서 나는 묘하고도 달달한 냄새 때문에 마음이 훈훈해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166)

 

그래. 그는 95% 정도는 아이가 이쁜 걸 알고 있다. 다행이다.

내 아이만 그런 건 아니다. 아이들의 5% 잘못을 지적질하는 것이 교사의 본분은 아니다.

95%의 발전을 위해서 5%의 잘못을 바루어 나가는 것이 교사의 본질이다.

 

결국 인간은 자아에 의해 굴절된 세계를 경험할 뿐이다.(니체, 184)

 

그의 이 책이 재미있고, 유용하기도 하지만, 한계가 드러나는 부분이 이런 것이다.

그는 국립대 교수로서 살아온 모범생이라는 것.

그가 가르치는 학생들 역시 상당히 우수한 성적을 거둔 모범생들이었다는 것.

 

성취와 과정을 다 잡아야 하므로 나는 뭔가를 '취미'로 배우지 못한다.

그것은 '성공'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나는 음반을 모으고 그것을 열심히 듣는데,

그것 또한 내가 하는 어떤 일,

예를 들면 글쓰기 같은 것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198)

 

언제나 너무 착한 여자로 치부되었던 여자들이여.

좀 늦었지만 이제는 '늙은 애'가 될 기회를 놓치지 말기 바란다.

'늙은 애'가 되어 '애늙은이'였던 자신을 많이 토닥여주길 바란다.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가가길 바란다.(206)

 

이런 작가가 나는 안쓰럽고 짠하다.

그가 애늙은이였던 시절을 거쳐, 아직도 '최선'을 다해 달리고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늙은 애'든 '어린 애'든

'애'는 '최선'을 다해 무엇을 하지 않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철부지'라는 말도 그렇다.

 

그저 자기 맘에 내키면 하는 사람을 '애'라고 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을 '자유인'이라 부른다면,

'낙타'처럼 뚜벅뚜벅 맡을 일을 성싱히 하는 사람보다,

'사자'처럼 용맹스럽게 자기 일을 성취하는 사람보다,

'어린이'처럼 바닷가 모래밭에서 조개 껍데기와 모래성으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을 높이친 니체의 말을

머리로 이해하는 사람은 '애'가 아니다.

니체의 저 말은, 몸이 무람없이 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늙은 애'는 훈련이 필요하고, 철학이 필요한 경지일 것이다.

 

 

건강함이란 상처받을 수 있는 능력.(레비나스, 224)

 

애늙은이들은 달리다가 넘어져 상처입는 일이 드물다.

늘 주위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생활해서,

조용하고, 어른스러우며, 조심스럽게 산다.

그래서 다들 '참 어른스럽다.'며 칭찬한다.

 

그러나, 그는 '건강하지 못한 상태'였던 것이다.

상처가 생겨야 딱지가 앉고 저항이 생기는 법이다.

상처를 비껴가기만 해서는 딱지도, 저항도 요원한 일이다.

 

그가 사람들에게 인문학을 권하는 이유는, <건강하게 상처받기>를 가르치기 위해서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건강하게 상처받기>를,

<긁어 부스럼>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기를... 빌어 준다.

 

이건 그에게만 주는 비원이 아니라, 나에게 주는 용기와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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