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의 다상담 1 - 사랑, 몸, 고독 편 강신주의 다상담 1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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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살기 참 어렵다.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거쥐?

 

이럴 때, 철학관에 가서 물어보면... 답을 준다.

대신, 복채를 두둑히 내고, 답을 얻긴 하는데, 현대인은 애초에 점쟁이의 말을 신뢰할 마인드를 갖고 가지 않는다.

좀 용한가 하고 테스트를 한 다음에, 자기가 취할 것을 취해서 나오는 것이다.

 

그럼 철학자는 어떨까?

 

제가 철학자니까, 옳은 거는 옳은 거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제가 그렇게 못 살아도 옳은 것은 옳은 거니까.

선생님은 그렇게 사시나요?

저는 그렇게못 사라아요.

잘살지 못해도 저렇게 옳은 얘기를 해도 되는구나. 저를 보고 희망을 얻으세요.

옳은 거를 이야기하면서 그렇게 사는 것처럼만 하지 않으면 돼요.(232)

 

이 책에서는 '사랑, 몸, 고독'에 대한 이야기를 푼다.

 

강신주를 탐독하는 독자라면 그가 '사랑'에 목매다가 '고독'에 몸부림치는 작자인 줄 알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사랑' 이야기는 '몸'과 떨어지지 않는다. 현실적이다.

 

인간을 악기에 비유하는 그의 의견은 탁견이다.

그래서 그를 찾아 읽는 것이다.

 

여러분의 몸은 악기예요.

여기서 무슨 소리가 날지 모르죠.

앞으로 수천 곡의 음악이 만들어 질 거예요.

여러분이 이 세상에 그저 하나의 악기로 툭 던져진 거예요.

무슨 소리가 날까요?

무슨 소리가 나려면, 악기는 무언가에 접촉을 해야 되죠?

악기는 연주해줄 사람을 요구해요.(105)

 

그래서 궁합이 딱 맞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이 신이 나고 흥이 나서 살아갈 것이고,

웬수를 만난다면, 불협화음을 지속적으로 내게 될 것이니 그 의견은 일리가 있다.

그리고 그 몸이 자연스럽게 서로 어울려 화음을 내지를 때,

행복하다고 여길 때,

사랑의 마음 역시 아스라히 울려퍼지는 것이다.

사랑과 몸은 떼어놓고 생각해선 안되는 것이다.

몸 없는 사랑은 어불성설이다.

그의 사랑은 철저히 유물론적이다.

맞다. 몸이 없는 사랑은 신념이나 강박에 가까울 것이다.

 

행복은, 드물고 아주 희귀해요.

용기있는 사람만이, 기꺼이 상처받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만이 행복을 얻을 거예요.(157)

 

행복은 희귀하단다.

그러니, 우리는 그 희귀한 행복을 만나는 행운을 누리기를 그토록 소망하며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에 그렇게 몰입하는 것이다.

 

그러나,

삶에서 그런 '몰입'의 경험은 드물다.

어른이 되면서 점점 '몰입' 에서 벗어나 '객관'의 안경을 가장한 '고독'에 빠진다.

 

몰입할 것을 찾으면 고독을 피할 수도 있다.(175)

 

그래.

사랑이 가장 큰 몰입의 경험임을 다 알기에,

성인들 역시 새로운 사랑을 목마르게 기다리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어린 시절 그토록 궁금해하던 '몸'이 성인들에게선 더이상 새로운 것이 아닐 것이고,

사랑과 몸의 부딪힘이 별개의 것임을 금세 깨닫고 더욱 고독함에 휩싸이는 수도 많다.

 

자전거에 미치는 사람도 있고, 도박이나 주식에 빠지는 사람도 있다.

바둑에 영혼을 파는 사람도 있고, 산이나 낚시와 결혼하는 사람도 있다.

몰입은 고독의 도피처다.

그렇지만 그 몰입은 현실의 자신을 잠시 부정하게는 해도,

다시 돌아와야 할 현실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는 몰입은 해결책이 아님은 당연하다.

 

우리는 결코 시작하지 않는다.

우리는 결코 백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중간으로 미끄러져서 들어간다.

우리는 리듬들을 취하거나 아니면 리듬들을 부여하기도 한다.(263)

 

인간의 존재는 이미 중간에 존재한다.

순수한 시작의 시점에 놓일 순 없다.

삶의 지혜는,

그래서 관계와 리듬이다.

나를 행복하게 연주해줄 사람과 적절한 관계를 갖고,

나를 불행하게 연주하는 사람과는 적절한 거리를 갖는 일.

그래서 삶은 힘겹다.

 

눈독들일 때, 가장 아름답다

하마

손을 타면

단숨에 굴러 떨어지고 마는

토란잎 위

물방울 하나<이인원, 사랑은, 265>

 

사랑의 아슬아슬함이여.

오롯이 관심을 집중할 때,

소름 끼치게 짜릿한 집중을 보이는 그 순간의 마음의 움직임은 그대로 살아있는 서정시다.

울렁거리면서 흔들리는 매 순간의 소름의 순간을 지속하기란 쉽지 않다.

삶의 이치가 그렇다.

 

뭐, 사랑의 짜릿한 순간만을 탐닉한다면,

우리 심장의 미세한 박동의 배터리는 순간 먹통이 되어버릴지 모른다.

그 '사이'의 콤마 하나를 요리 굴리고 조리 음미하면서,

'사이'를 인지하고, '사이'를 인정하고,

드디어 '사이'로 들어가는 일...

그게 사는 일이고, 사랑일지도 모른다.

 

'사이'라는 것. 나를 버리고 '사이'가 되는 것.

너 또한 '사이'가 된다면 나를 만나리라.(이성복, 267)

 

너, 나

이 둘은 콤마로 인하여 구분지어지는 것 같지만,

또 이 둘 사이는 콤마로 연결되어있는 것이기도 하다.

나를 버리고 '사이'가 된다는 말은,

사랑을 통하여 '주체가 변용'된다는 말이다.

콤마를 서러워하기만 해서는,

'사이'를 통해 만나고, 사랑하는 '사이'가 될 수 없을 게다.

 

이 책은 상담 장면을 옮긴 것이라 좀 어수선하고 좀 잡다하다.

그렇지만 강신주의 이야기를 듣는 일은,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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