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으로 읽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창석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소설을 읽고 느끼는 감상은 두 부류일 것이다.

하나는 소설인지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는 늪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도중에 하차하는 경우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살이의 구도를 섬세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는 반응.

그런데, 특이하게 나는 두 가지 인상의 중간에 놓이게 되었다.

전체적인 구도에서 볼 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주제는 우리 인생에 던지는 의미가 무겁다. 내가 마흔이 되어버린 지금, 그 기나긴 시간들은 어디로 흘러갔단 말인가. 그 많던 싱아들은 누가 먹어버리고, 이젠 씨앗만이 남아버렸단 말인가. 이런 누구나 하게 마련인 생각들을 복잡하지만 섬세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 소설을 다 읽지 못했다. 여느 소설과 달리 이 소설은 하나의 일관된 줄거리의 맥락이 존재한다기 보다는, 순간 순간 그의 생활에서 일어나는 상황들을 그려내고 생각들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의식의 흐름>을 좇다 보면, 어느 새 내 과거들이 중첩되고, 내일의 할 일이 떠오르고, 엉켜버린 관계들을 풀 생각에 골몰하게 되어 버리는 책인 것이다. 결국 이 책에 몰두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하고, 책을 읽다가 도중하차 하게 되어버렸지만, 이 책을 읽은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이 책의 가치가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프루스트가 의도했던 것, 스완네 집 쪽으로 가는 길과 다른 길이 있지만, 그 길들은 결국 만나게 되어 있더라는 인생의 은유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그 유명한 시, ‘가지 못한 길’과는 다른 의미를 보여 준다. 로버트의 시에서는 인생의 결정 하나하나로 인해 달라지는 결과에 대한 탐구가 드러났다면, 마르셀의 이 소설에서는 인생의 궤적이 더 큰 규모로 읽히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그래서 줄거리가 파악되는 것이 중요한 소설이 아니고, 마치 성경처럼 어디를 읽든 나름대로의 읽을 거리가 제공되는 것이다.


세상에는 하나의 우주가 있는 게 아니라 개인의 수효만큼 아주 다른 우주가 있다. 그것을 잃어 버리지 않으려는 작업으로써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란 소설이 의미가 있을 것이다.

마치 시점에 따라 달리 보이는 종탑의 모습처럼, 현실에 충실하려는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나의 삶 역시 ‘그때 그때 달라요.’ 그런 거다. 그렇게 이해하고 만족하기로 했다. 이 책을 마저 다 읽는다는 것이 나의 독서 행위에 보탬을 계속 줄 거라고 생각할 수 없었기에.


다양한 교양과 지식, 직관력과 풍부한 문체가 이 소설을 지탱하고 있지만, 처음 이 책이 프랑스에서 발간이 거부되었듯이, 인정받기엔 쉬운 책일 수 없다. 나도 누구에게도 이 책을 권할 수 없는 이유가 이것이다. <한권으로 읽는>이란 제목으로 역자는 편집을 시도했지만, 이 책은 모두 읽는 것 보다는, 전체적인 구도를 읽어 내거나, 부분부분 읽으면서 우리 삶의 부분성과 총체성을 생각할 수 있다면 성공한 읽기일 수 있기 때문에, 성공적인 저서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 책은 결코 다이제스트(소화하기 쉬운 책)는 아니다. 열 한 권 분량을 칠백 페이지의 한 권으로 묶었다고는 해도, 객관적 질량은 가벼워졌을지 몰라도, 소설의 비중은 무거워지지도 가벼워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프루스트는 이 세상 어디에나 있다. 내 속에 부처가 들어앉아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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