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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 정호승 시집 ㅣ 창비시선 362
정호승 지음 / 창비 / 2013년 6월
평점 :
정호승의 이번 시집은 표지에 등대가 둘 들어있다.
양켠 방파제에서 서로 마주보는 등대.
그들은 한 쌍인 것 같지만,
서로 반대편 방파제에서 불빛을 비춰주므로 영원히 만날 일이 없는 노릇이다.
그렇지만, 등대가 이렇게 둘이 아니라면,
이 방파제에 배가 드나들기는 밤중이나 안개낀 날이면 불가능할 일.
서로 만나지 않고 마주보고 선 등대들은,
앞이 보이지 않는 여행길에 선 배들에게는,
삶의 여정에 길을 터주는 불빛을 반짝여 주는 것들이다.
이번 시집은 메말라가는 나이의 시인을 느끼게 해준다.
어쩌면,
박범신의 '은교'의 '이적요' 시인이
나이들어가면서 삶의 습도가 바짝 메말라가는,
그 마음을 적어가고 있는 글처럼도 느껴졌다.
늙어간다고 사랑을 잃겠느냐
늙어간다고 사랑도 늙겠느냐 (산수유에게, 부분)
아마도 시인이 이적요를 만났다면,
둘이서 밤새 술이라도 마시며 죽이 짝 들어맞았을는지도 모른다.
아침마다 내가 살아있음에,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행사인 성체조배를 제목으로 한 시는 절창이다.
꽃이 물을 만나
물의 꽃이 되듯
물이 꽃을 만나
꽃의 물이 되듯
밤하늘이 별을 만나
별의 밤하늘이 되듯
별이 밤하늘을 만나
밤하늘의 별이 되듯
내가 당신을 만나
당신의 내가 되듯
당신이 나를 만나
나의 당신이 되듯 (성체조배, 전문)
삶의 여행길은
그리하여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람의 마음의 설산뿐(여행, 부분)
이라고 하였거니...
서로 만나서 하나되는 일은 경험할 수 없지만,
저 등대들처럼 마주 비추이면서,
존재의 이유를 탐구하는
그런 여행의 동반자를 '발견'하는 일이,
결국 인생이란 여정의 의미라면 의미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도 그런 것을 느낀 것인가 싶다.
서로 마주선 방파제에서 낮에는 붉은색 흰색의 등대 외벽으로,
밤이면 자신만의 고유한 불빛의 파장으로,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주는 등대처럼 사는 것도 아름답지 않겠는가.
나는 당신의 해우소
따사로운 햇살 가득 안고
텅 비어 있는 가을의 집
산사에 오시거든 언제든지
나의 집에 똥을 누고 편히 가시라
모든 망상과 번뇌의 똥까지 시원히 누고 가시라
가시다가 굳이 돌아보지는 마시고
발걸음도 사뿐히 떠나가시라
나는 남아 낙엽과 함께 향기롭게 썩어가리니
나는 당신의 해우소
낙엽의 집(해우소, 전문)
근심을 푸는 집, 해우소...
뱃속의 근심만 풀 것이 아니라,
마음 속 근심 풀 곳도 세상엔 필요한 것.
여행길에서 해우소 만나 근심을 풀고,
낙엽과 함께 향기롭게 썩어간다면,
마음 속 책갈피마다
문자향 서권기로 반짝이는 삶을 누리며 늙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