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번의 연애
성석제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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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의 글을 참 좋아했다.

그의 글은... 세상에 얽매이지 않아서 좋았다.

세상은 아픈데, 그의 글은 경쾌했고,

사람들이 아프지만, 그래서 어수룩하고, 제구실을 못하더라도, 그 발걸음들이 지나치게 무겁진 않아 좋았다.

마치 위화의 사람들처럼, 모옌의 사람들처럼... 가벼운 속에서 진지함이 모색되는 소설들이라 좋았다.

 

그런데, 그도 꼰대가 되어가는지...

이 소설 역시 경쾌한 이야기들로 진행되는데,

그 매력적인 박민현이란 캐릭터가 뜬금없이 서울대를 들어가고,

온갖 '교과서적 대사'를 읊조려대는 통에,

성석제 소설이 '병맛'이 되어버리는 느낌을 여러 차례 경험했다.

 

'병맛'은  '신 같은 맛'의 줄임말로

주로 대상에 대한 조롱의 의미를 내포하고,

대상이 '맥락 없고 형편없으며 어이없음'을 뜻하는 신조어라고 한다.(위키백과)

 

왜 그의 소설이 쫀득쫀득한 말맛에서 벗어나서 병맛이 되고 말았는지...

성석제가 너무 아는 것이 많아져서,

그것들이 소설 속에 그만 엎질러진 병처럼 흘러내려서 그렇게 된 거나 아닌지...

산악 자전거 하나에서도 그의 잘난 체는 재미를 반감시키고,

어수룩한 주인공 앞에 등장하는 박민현의 '사랑한다고 말해줘'는 한껏 부풀었던 사랑을 한 순간에 오그라들게 만들기 제격인 대사다.

 

생각해보니, 내게 행복은 기억이 아니라 경험이었다...(297)

 

행복했던 기억, 추억은 뇌를 타고 흐르는 전류에 불과할 순 없다.

경험되지 않은 행복은 기억될 수 없는 이유에서다.

사람에게 행복의 추억이란, 경험이 세포 하나하나에 각인된 것일 게다.

 

나는 멋진 인생을 살았어.

너때문에. 당신 덕분에. 고마워, 고마워요.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297)

 

멋진 인생은 늘 너때문인 것이다.

경험은 나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멋진 당신이 있어서, 내 인생 역시 멋지게 기억되는 것.

이 소설이 개연성을 잃고 있으나,

이런 삶의 깨달음에 이르른 작가의 생각에는 나도 공감이 갔다.

 

삶이란, 행복이란, 잘 사는 것이란 무엇인지...

 

최대 길이 이십 미터에 무게 팔십 톤에 이르는 참고래가

 왜 그 엄청난 에너지를 들여서 수면 위 허공으로 뛰어오르는지 알 수 없다.

경제성으로 계산이 안 되고 두뇌로는 예측할 수 없다.

그건 내 머리통을 후려갈기는 깨달음의 몽둥이질 같았다.

인생에 특별히 깨달을 건 없다는 깨달음.

중요한 건 살아가는 것이라는.

중요한 건 존재하며 느끼는 것이라는.(288)

 

그래. 삶에서 중요한 것은 오늘 내가 느끼는 것이다.

나를 포근하게 만드는 사람과 있는 오늘이 중요한 것이다.

경제성을 따지고, 계산적인 타산적 하루를 아무리 잘 기획하여 살더라도,

깨달음은 늘 헛되고 늦게 오는 것.

다 지나가고 나서, 즐거움도 고통도 다 지나가고 나서, 헛되이 헛물켜는 것이 삶인 것.

오늘 존재하는 나를, 오늘 절절히 느낄 수 있다면... 잘 산 것.

 

과거에 너무 얽매일 순 없다.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어릴 때의 가족적 불운,

그게 우리를 모험으로 떠나게 하는 배후의 힘이야.(88)

 

지난 시절, 대부분의 어린 시절들은 지독하게 불운했다.

가난했고, 부모들은 무지했으며, 동물적이었다.

학교란 곳은 군대의 연장이었고,

직장이란 곳 역시, 질서를 제일로 치는 군대였다.

직장을 위해 학교는 억압의 기제를 사회화하는 곳이었고,

그래서 군대를 다녀와야 인간이 된다는 말을 진리인 것처럼 나불대던 것이었다.

폭력은 질서를 잡기 위해서라면 용인되는 시대였다.

 

그 과거를 딛고 선 지성인이라면, 그 시대의 불운을 발판으로 솟구쳐야 한다.

고래가 되어,

특별한 이유를 묻고 답하며 솟구치는 행위 말고,

본능적으로 삶의 온 힘을 다하여 높이 솟구쳐 온몸으로 바닷물을 두드리는 삶의 쾌감.

가난과 억압의 시절을 부정하는 카타르시스의 경험이 바로 '행복'이라는 '경험'을 느끼게 하는 것일게다.

 

폭력은 삶의 일부다.

폭력과 공격성이 우리 일상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72)

 

특히나 한국은 '왕조국가의 폭력', '식민지의 폭력', '냉전의 폭력', '스몰 세계대전(한국전쟁)의 폭력', '독재자의 폭력', '군대의 폭력', '학교의 폭력', '사회 구조의 폭력', '남자의 폭력', '경제적 불평등의 폭력'.... 이런 끝도 없는 폭력의 구조가 마치 거미줄처럼 얽히고 설킨 구조여서, 폭력 자체가 질서를 위한 필요충분조건인 것처럼 인식되기도 한다.

 

이 소설은 달콤한 연애담도 아니고,

씁쓸한 시대적 뒷담화도 아니고,

고래 잡으러 떠나자는 위안물도 아니고,

재미라는 당의정을 입혀 독자에게 들이미는 훈계조도 아니다.

 

구룡포란 작은 도시에서 강한 캐릭터를 가진 여자와 남자를 만드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 개성들이 현대인의 고뇌와 갈등 구조에 휘말리기보다는,

지나치게 '우연성'과 '선택받은 자의 성공'구조에 기대는 소설처럼 보여져서,

독자를 '헐~~~' 하고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 뜬금없음이

고래 좇던 포장이 고래 꽁무니 쳐다보듯~ 만드는 실망이 있다.

 

성석제의 소설이 좀더 가볍고, 경쾌해졌음 좋겠다.

아는 걸 좀 더 내려놓고, 그의 기발함이 더 발랄한 재기로 자글자글 끓어 넘쳤음 좋겠다.

 

라면은 국물이 철철 넘치면 맛이 없는 법이다.

바특하게 끓는 국물에 졸깃한 면발이 공기와 수포 사이에서 적절한 퍼짐의 경지를

잇몸에 전달할 때, 라면을 씹는 대뇌는 희열을 느끼게 되는 법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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