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을 왜 하지? - 꼼꼼하게 들여다본 아홉 개의 수업 장면
서근원 지음 / 우리교육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바디는 판소리를 스승이 가르친 그대로 익힌 것이고, 더늠은 제자가 더 늫-은 것이다. 원본의 복원 면에서 바디가 훨씬 낫다면, 새로운 창작이란 면에서 후자가 유리하겠다.

이 책은 초등 교사로 근무하다 사표를 내고 공부를 계속하는 작가의 뼈저린 수업 관찰 기록이다. 우리 교육(초등편)이라는 '불온한(?)' 잡지에 연재된 것을 책으로 엮은 듯 하다. 난 중등 책자는 자주 보게 되지만, 초등 이야기는 다른 세상 이야기인 듯이 생각해 왔다.

나도 서울에서 중학교 교사로 발령 받아서 5년 반, 부산의 남자 중학교 교사로 4년 반, 여자 중학교 교사로 1년 반, 남녀공학 일반계 교사로 4년 반을 근무하고 이제 공업계 고등학교로 전근을 가게 되는 십육 년 동안, 많게는 주당 24시간의 수업을(특활과 학급회 빼고), 적게는 14시간의 수업을 했고, 특히 고등학교에 와서는 특기적성, 보충학습, 특강 등 다양한 이름으로 끊임없이 수업을 해 왔다.

그렇지만, 수업을 왜 하는지... 에 대해서 고민을 깊이 한 것은 몇 해 되지 않았다. 수업은 맡기니까 하고 있었고, 나의 수업의 목표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중학교에서는 교육개혁을 추진한 이후로 고등학교 입시가 내신제로 바뀌었고,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할 이유가 사라져서 수업에 몰두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고 할 수 있다. 직장은 시장경제의 도입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 체제로 들어섰고, 컴퓨터를 활용한 수업, 기자재의 활용, 학생 중심의 수업이 <열린 교육>의 이름으로 우리를 짓밟았다. 여유있던 시간에 일본어도 공부하던 교사 생활이 연구학교 중심, 업무 중심으로 돌아서는 시발점이 된 1996년, 그 후로 9년간 나는 나를 잃고 살았던 것 같다.

그나마 일반계 고교로 옮긴 후에는 수업이 재미있었다. 나는 수업을 왜 하지? 하는 물음에 그저, 아이들이 열심히 들으니깐, 더 충실한 내용을 들려 주기 위해 교재를 편집하고, 이야기를 만들고, 나름대로 몇 가지 수업 방법을 터득하기도 했다. 내 지난 십육년의 수업의 <화두>라면, 재미있는 수업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처음 수업을 하던 1989년에는 세상이 참 차가웠다. 발령받은 지 넉 달 만에 해직될 뻔도 했다. 그 후 징집 영장이 나와 군대로 도망하고 말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몇 년 간은 경직된 사상을 토로하는 열변형 수업이 되기 일쑤였다. 그 땐 그나마 젊었고 아이들이랑 친했으니 불평의 이야기를 덜 들을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수업에서 아이들이 졸거나 학습 내용이 재미없던 시간들을 지나면서, 아이들이 나를 쳐다볼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 후로 나는 서서히 교실에만 들어서면 코미디언이 되어 갔다. 자연스럽게 <지위 거래>를 통해 자주 나는 낮아졌고, 수업의 질과는 상관 없이 수업에서 아이들이 등 돌리는 일이 줄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생각하면 아이들이 <즐겁게> 수업하도록 <이야기>를 혼자 꾸며내고, 그림도 그려 보이고, 나름대로 다양한 방법을 창안한 것이 아직도 내 수업 시간에 아이들이 고개를 박고 잠만 자진 않도록 한 원동력이 된 듯 하다.

이 책에서는 교육 개혁 이후 학교에 몰아닥친, 행동주의 수업 연구, 절차적 지식을 중시하는 학생 중심의 수업 연구 활동으로 흐르고 있는 <좋은 수업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교실의 수업을 아홉 장면 서술하고 있다. 참 마음 아픈 현실이다.

철학이 없는 교실. 삶이 없는 교실. 교실에는 국가의 명을 받아 학생을 지도하는 국가공무원으로써의 <교사>가 있고, 좋은 학교에 진학하고 좋은 직장을 얻어 부와 명예를 축적하고 남을 짓밟기 위해 경쟁하는 <학생>이 있으며, <하면 된다> <2호선을 타자(서울의 유명 대학들이 2호선 주변에 있다는...)> <지금 잠을 자면 꿈을 꾸지만, 지금 공부를 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 이런 급훈이 내려다 보는 파리한 형광등 불빛 밝힌 교실에는 <경쟁과 살기>가 등등하다. 이 책에 등장한 초등 교실에서도 9년 전의 <교육 개혁>의 무지갯빛 미래를 위해 희생되었던 교실의 살육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공교육"이라 함은 <왜 하는가> <어떤 인간을 기를 것인가>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그러자면 여건을 어떻게 마련해야 하는가> 를 총체적으로 고민하는 국가의 거대 <시스템>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거대 시스템이 올바로 설계, 유지, 보수 되기 위해서는 <철학적 청사진>과 <국민적 의견의 통합>, <예산의 지원> 등의 각종 <프로그램>이 올바로 기능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경쟁체제가 몰고온 교육개혁은 외국의 결과만을 도입한 <교육 방법, 공학>의 측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하였고, 그러한 방법만 도입한다면 결과는 <선진국>으로 나타날 것이라 착각하였다.

그래서 전국의 모든 학교에 삼천만원을 들여 교무실에 칸막이를 하였고(이에 칸막이 회사만 돈벼락을 맞았다.), 모든 학교의 교실에 42인치 프로젝션 티브이를 넣어 주었고, 펜티엄급 컴퓨터를 전격적으로 설치하였다.(그 설치가 급속히 완료된 해는 97년도로 대통령 선거 직전이었고, 당연히 그 기종은 일률적으로 삼성이었고, 삼성은 엄청난 돈을 벌어 이모 후보에게 밀어주었을 것이다.) 지금 각 학교의 42인치 티브이는 비오는 날 전체 조회 관람용으로 쓰이고, 월드컵 축구 중계용으로 쓰인다. 아, 학년말에 교사들이 정신없이 바쁘면 비디오를 보기도 하고, 체육 시간엔 간이 탈의실용 벽면으로도 쓰인다. 그 때의 컴퓨터가 지금은 모두 쓰레기가 되어 버렸음은 말할 것도 없다.

요즘 하는 작업들은 각 학교에 오천만원씩 줘서 도서실을 <정보 종합 열람실>로 만들려 한다. 도서실에 컴퓨터를 좀 넣고, 시설을 개선해서 도배를 다시 하고, 책상을 다 내다 버리고 새 것으로 교체하면 <정보가 종합적으로 열람되는 도서실>로 개선된다.

공교육이 무너지는 이유는 <사교육>에 있지 않다. 공교육이 무너지는 이유는 <부모들의 잘못된 교육열>에 있지 않다. 공교육의 붕괴 이유는 <철학>의 부재에 있고, <청사진>의 부재에 있고, <고민>의 부재에 있고, <고민할 시간>의 부재에 있다. <공학>이 철학의 위에서고, <시범학교, 연구학교, 수업연구대회, 각종 경진대회, 교사연구대회>등 단시일내에 세계적으로 가장 훌륭한 결과들을 뽑아내는 연구들이 <청사진>의 위에 오르며, <남을 짓밟고 승진에 눈먼 사욕>이 <고민>의 위에 서고, 학교장은 <돈>에 욕심을 부리다간 잘리게 생겼고 교사를 통제할 힘은 전혀 없는 <경영권이 전혀 없는> 전문 경영인으로 투덜거리기만 하는 학교에 미래는 없다.

그러나 학교에 교육이 없을 수 있나? 눈을 초롱거리는 아이들이 있고, 그 눈을 외면하지 못하는 교사들이 있고, 서로 생각이 많이 다르더라도 학교라는 제도 내에서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 그곳에 교육은 느리지만 숨쉬고 있고, 화산재가 덮어버려 불모의 땅으로 변한 듯한 잿더미에서도 싹이 트듯이 사랑이 있는 것이다. 수업은 교육의 가장 주된 형식이다. <교육과정>이 명시적으로 드러난 것 중 가장 주된 것이 <수업>이란 이야기다. 물론 수업을 통해서도 '암시적'으로 <교육과정>을 강조할 수도 있고 무시할 수도 있다. 수업을 통해 교육과정의 긍정적 측면을 배울 수도 있고, 암시적인 것을 부정적으로 내면화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문제는 <기본>으로 돌아가야 하리라. 수업의 기본은 무엇인가. 수업을 설계하고, 진행하고, 반성하는 과정을 학교급별에 따라서 어떻게 달리 운영해야 하는지... 문제도 아닌 것 같은 것이 곰곰이 들여다보면 문제란 것을 깨닫는 것이 <기본>을 익혀가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지난 십여년간 <바디>를 익힌 선생이었다면, 이제 <더늠>을 향한 몸짓을 익혀 나가리라... 생각하는 봄방학의 봄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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