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외면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207
복효근 지음 / 실천문학사 / 2013년 1월
평점 :
품절


어떤 시가 하나 곰살맞게 나한테 와서는,

찰싹 달라붙어서,

헤헤거리면서 팔짱을 끼고 애교를 부리는 녀석이 있으면,

그 시집 전체가 친숙하지만,

어떨 때는 데면데면해서 낯설어보이기도 한다.

 

시라는 것이 그렇다.

아니, 시집을 읽는 일은 그렇다.

시집 전체가 눈에 쏘옥 들어오긴 힘들고,

어떤 시라도 하나 맘에 쏙 들어오면, 그 시집 전체가 맘에 들곤 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이 시집에서 내 맘에 쏙 들어온 시는 이 시다.

 

사랑한 적 없다

 

다시 같은 자리에 돋는 새잎이란 없다

이미 새잎이 아니지

낯선 자리 비켜서

옛 흉터를 바라보며 지우며 새잎은 핀다

 

이전의 사라은 상처이거나 흉터다

이후의 사랑도 그러할 것이므로

사랑을 두려워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조금 비켜서

덤덤히 바라볼 수 있는 눈빛으로

나무의 새순은 조금 더 높은 곳에서 싹튼다

 

제 형체와 빛깔과 향기를

지우고, 지고 부정하고 배반하고

새잎은 비로소 새잎이다

 

내 너를 사랑한 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사랑한 적 없다

오늘은 내 어느 부위에 상처를 남겨두랴

 

엄살 피우지 말자

남은 날 가운데 가장 새것이어서

우리 세포는 너무 성하다

흉터 따위를 기억하는 것은 사랑도 아니다

 

지금 네가 마지막 첫사랑이다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불교의 가르침처럼,

깃발을 흔드는 것은 바람도 아니고, 깃발도 아니고, 네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라는 이야기처럼,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이 시에 쓰인 '사랑'은 다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다.

다만, 시인이 강조하는 것은 새싹과도 같은 파릇파릇한 삶의 에너지로 넘쳐나는 희망을 가진 존재처럼,

첫사랑으로서 너를 사랑한다는 이야기의 역설이 짜릿하다.

사랑해... 사랑해...를 백만번 겹쳐쓰는 것보다도,

엄살 피우지 말자,

사랑한다.

이런 사랑 고백은 참 후련하다.

 

이 시는 여러 겹으로 겹쳐 읽을 수 있다.

사람마다 떠오르는 삶의 추억이 다를 수 있다.

흉터, 떨어진 잎사귀에 얽매여 '새싹'을 놓치지말자는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겠고,

사랑에 너무 얽매이면 진짜 사랑을 놓치고 만다는 이야기로 볼 수도 있겠다.

이런 모호한 시가 나는 좋다.

 

살아있는 날까지는

피어라, 꽃,

피지 않아도 좋을 꽃은 없다 ('시인의 말' 중에서)

 

참 좋은 말이다.

피어라, 꽃!

 

그의 이 시도 좋다.

 

 

소쩍새 시 창작 강의

 

달빛 백지장으로 펼쳐놓고

시 창작법 가르치고 있다

 

말은 안 하고

춤으로 춤을 가르치는 춤 선생처럼

시는 안 가르치고

온통 울음만 울어댄다

 

애 주먹만 한 가슴을 공명통 삼아

잘못 산 것을,

잘못 살 것까지를 뉘우쳐 통성기도하듯

 

운다

 

그 울음의 깊이로 말하면

바닥까지 갔다가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은

달빛의 칠흑 우물거울이다

 

2음보 혹은 3음보

수사가 화려하지 않다

울음은 모름지기 그런 것이다

 

이윽고 몇 소절에는 핏자욱이 묻어나기도 해서

다는 아니더라도 사랑이 더러는

죽고 싶을 만큼

죽어도 좋을 만큼 아팠음을

그렇잖으면 시도 울음도 아니라는 듯 운다

 

유일한 진실이 있다면 그 핏빛

울음뿐이라고

무슨 시 창작 강의가 불은 달빛으로 흥건하다

 

 

나머지 시들은 어떠냐고?

글쎄, 한번 읽어 보랄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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