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 조르디의 날 / 홍사중


동화작가 안데르센은 매우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어머니를 따라 처음으로 극장에 간 그는 관중의 뒷머리들을 세어보면 서 이렇게 생각했다. {저 머리들이 모두 과자였으면 좋겠다.} 지난번 밸런타인의 날에 들러본 어느 대형서점에서 젊은 여성들이 초콜릿 판매 코너에 몰려 있는 것을 보고 초콜릿 대신에 책을 남자 친구들에게 선물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고생각했다. 화이트 데이인가 뭔가 하는 날에 캔디가 잘 팔렸다는 얘기를 들으면서도 그날 왜 젊은이들이 선 물로 책을 주고받지 못하는가 하는 생각도 해봤다.

우리에게는 책을 선물로 주고받는 버릇이 너무도 없다. 세계에서 가장 독서를 많이 한다는 일본에서는 도서상품권의 판매 액수가 다른 상품권보다 많다. 언젠가 동경의 제국호텔에서 22년동안 사장 비서로 근무하다 퇴직하는 사원에게 5백명의 직원들이 제각기 1천엔씩의 도서권을 선물로 주었다는 얘기도 있다. 스페인에서는 밸런타인의 날이 없는 대신 [쌍 조르디 데이]라는 게 있다. 스페인 사람들은 책을 잘 읽지 않기로 유명하다. 그런 스페인 사람들도 [돈 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가 죽은 날을 기념해서 만든 이날, 4월23일에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붉은 장미와 함께 책을 선사한다.

책을 일깨워주는 날이 가장 많은 것은 아마도 미국일 것이다. 우선 1월 셋째주 일요일부터 다음 주 토요일까지가 [세계 인쇄 주간]이다. 15세기 유럽에서 처음으로 인쇄술이 발명된 것을 기념하는 이 주간에는 다채로운 행사로 사람들에게 새삼 책에 대한 관심을 일깨워준다. 2월16일은 20세기 영문학을 대표하는 비평가 I.A. 리처드의 생일을 기념하는 [비평가의 날]이다.

3월은 [시의 달]이다. 3월 31일은 데카르트의 생일을 기념하여 제정한 [철학자의 날]이다.이날 서점들은 철학에 관한 특별전시들을 한다. 1805년에 태어난 안데르센의 생일을 기념하는 [국제 어린이 도서의 날]이 4월2일이다. 5월 16일은 [전기작가의 날]이다. 9월은 {편집 자와 작가에게 친절하자}는 달이다.

미국에는 이렇게 묘한 주간도 많다. [검열자의 날]이라는 것도 있다. [빌린책 돌려주기 주간]이라는 것도 3월1일부터 7일까지다. 1876년 10월 6일에 미국도서관 협회가 창설되었다 하여 이날은 [도서관원의 날]로 되어있다. 웹스터의 생일을 기념하는 [사전의 날](10월16일)도 있다. 11월 2일은 [출판인의 날]이며, [역사가의 날]인 12월 29일에는 미국 전국의 서점에서 역사책들의 특별판매가 있다.

출판되는 서적수도 미국은 세계 제1이다. 도서관도 세계에서 제일 많다. 꼭 읽어야 하는 필수나 참고 서적이 많기로도 미국 대학이 세계 최고다. 그런데도 10년전에 앨런 블룸은 [미국정신의 종막]에서 {우리 학생들은 독서하는 버릇이며 취미를 상실했다}고 개탄했다. 그보다 1세기 전에 영국의 철학자 존 러스킨도 이렇게 한탄한 적이 있다. {우리가 한 민족으로서 과연 얼마나 책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당신은 우리가 경마에 쓰는 돈과 비교해 볼 때 도서관에 얼마나 돈을 쓰고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러나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꾸준히 양서를 내놓는 출판사들이 많다. 3천이 넘는 전국의 도서관들이 양서가 나올때마다 사주기 때문이다. 출판업은 다른 [업]과는 다르다. 그것은 지식산업이다. 그렇게나 중요한 출판문화가 우리나라에서는 완전히 정치의 사각지대에 들어 있다. 여러 해에 걸쳐 출판인들의 숙원사업이던 파주 출판문화단지 계획도 관계 당국의 어느 국장 책상서랍 속에서 마냥 사장되고 있었다. 지금 우리나라의 출판업계는 빈사상태에 놓여 있다. 그것은 그대로 우리나라 문화를 악성빈혈증으로 몰아가고 있다.

엊그제 문예진흥원이 20여년간 근무한 직원에게 5억원이 넘는 퇴직금을 지급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국공립도서관의 연간 도서구입비가, 혹 잘못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통틀어서 20억원도 안된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저 관심이 없을 뿐이다. 문예진흥원이 움켜쥐고 있는 기금도 3천억원 가까이나 된다.그런데도 우리네 출판업계는 단 60억원의 부도로 도산 위기에 몰리고 있다.



출처 : 조선일보 98. 3.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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