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시인선 32
박준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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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 83년 생이라니 이제 가득 서른이다.

시들이 신선하고, 맘이 깊어 보인다. 느낌이 좋다.

그이의 시들이 품고 있는 청파동, 연신내, 모래내, 수색... 모두 '물'과 관련된 지역들인데,

그 동네가 품고 있는 가난한 골목길들 속에서...

어쩜 통영의 동피랑 마을의 가난한 골목길들이 품고 있는,

다사로운 사람들의 정감 같은 것이 아릿한 아픔과 함께 묻어나는 느낌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기대된다. 앞으로의 시집들이...

 

세상은 참 찌질하다.

시인은, 그 찌질함을 넌지시 보여줌으로써,

독자에게 위안을 주는 사람이다.

 

뻔히 저기 있는 것을 알고 있으나

가까이 가면 갈수록 멀어지는 세계에 살고 있는 고통(김현)

 

그 고통을 툭, 보여주는 언어로 던져주는 시인이 고마울 수밖에~ ^^

 

나는 오늘 너를

화구에 밀어넣고

 

벽제의 긴

언덕을 내려와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냐며

말을 건네는 친구에게

 

답 대신 근처 식당가로

차를 돌린 나는 오늘 알았다

 

기억은 간판들처럼

나를 멀리 데려가는 것이었고

 

울음에는

숨이 들어 있었다

 

사람의 울음을

슬프게 하는 것은

통곡이 아니라

 

곡과 곡 사이

급하게 들이마시며 내는

숨의 소리였다

 

너는 오늘

내가 밀어넣었던

 

양평해장국 빛이라서

아니면 우리가 시켜 먹던

할머니 보쌈이나 유천 칡냉면 같은 색이라서

 

그걸 색이라고 불러도 될까

망설이는 사이에

 

네 짧은 이름처럼

누워 울고 싶은 오늘

 

달게 자고 일어난 아침

너에게 받은 생일상을 생각하다

 

이건 미역국이고 이건 건새우볶음

이건 참치계란부침이야

 

오늘 이 쌀밥은

뼈처럼 희고

김치는 중국산이라

 

망자의 모발을 마당에 심고

이듬해 봄을 기다린다는

중국의 어느 소수민족을 생각하는 오늘

 

바람은

바람이어서

조금 애매한

 

바람이

바람이 될 때까지

불어서 추운

 

새들이

아무 나무에나

집을 지을 것 같지는 않은

 

나는 오늘 (오늘의 식단 - 영(暎)에게, 전문)

 

그의 우울과 젖은 눈빛이 어디서 연유한 것일지를 엿볼 수 있는 시다.

곡과 곡 사이 급하게 들이마시며 내는 숨의 소리,

까지를 듣는 시인의 귀...

그의 귀에 의탁한 세상을 들을 만 하겠다.

 

그의 시에는 '미인'이 자주 등장한다.

얼마나 예쁘기에... 미인이라고 부르랴마는...

예쁜 것은... 객관적인 데이터로 판가름할 수 없는 것이므로...

정말 사랑스런 사람이라면, '기룬 것은 다 님이요...' 하는 맘으로... '미인'이라 불렀으렷다.

 

한철 머무는 마음에게

서로의 전부를 쥐여주던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마음 한철, 부분)

 

나는 그곳에서

유월이 오도록

꽃잎 같은 책장만 넘겼다

 

저녁이 되면

그 집의 불빛은

여자의 눈 및 점처럼 돋아나고

 

새로 자란 명아주 잎들 위로

웃비가 내리다 가기도 했다

 

책장을 덮어도

눈이 자꾸 부시던

유월이었다 (유월의 독서, 부분)

 

과거형 선어말 어미 '었'이 이렇게 밟히는 시도 있는 법이다.

 

나는 통영에 가서야  뱃사람들은 바닷길을 외울 때 앞이 아

니라 배가 지나온 뒤의 광경을 기억한다는 사실, 그리고

당신의 무릎이 아주 차갑다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되었다(환절기, 부분)

 

계절이 바뀌듯,

사람도 바뀐다.

누구나 다 '과거의 사람'이 되는 법이다. 언젠가는...

그럴 때, 너무 헛헛해 하지 말란다.

어떤 길은 말이다.

앞이 아니라, 지나온 뒤의 광경을 기억해서 외워야 하는, 그런 얄궂은 운명의 길도 있는 법이라고...

그래도, 그런 운명이라도... 통, 통, 통... 통통배같은 통영에 갔다는 핑계로...

운명을 사랑해야지 않겠냐고...

그런 운명도 있다고...

 

삶의 빛은, 얄팍한 형식으로

어딘가에서 오는 빛을 되쏘는 것이 아님을...

삶의 광택은, 결코 빛날 것처럼 보이지 않는 먹먹한 가죽을 닦고 닦는 가운데,

자기도 모르는 새, 살~ 빛을 내보이는 속내를

군대말투로 보여줄 줄 아는 사내.

이런 시 쓰는 사내를 좋아할 줄 아는 여자랑 이야길 하고 싶다. (살~은 경상도 사투리인데, '살짝' 이란 뜻이다.)

 

이게 진짜지 말입니다 물광이 빛나니, 불광이 깨끗하니

하는 얘기는 이제 고향 앞으로 갓, 이지 말입니다 이건 물

불을 안 가리는 광이라서 말입니다 제가 지난 휴가 때 용

산역을 지나는데 말입니다 거짓말 아니고 말입니다 바닥

에 엎어 자던 노숙자 아저씨가 제 군화 빛에 눈이 부셔 깼

지 말입니다

 

구선 구두 약통에 불을 질러버리고 말입니다 불로 지져둔

군화에 약을 삼삼하게 바르지 말입니다 바르고 바르고 약

이 마르며 또 바르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흠집을

대하는 우리의 기본적인 자세지 말입니다 깊게 파인 흠집

을 약으로 메우는 것은 신병들이나 하는 짓 아닙니까 그렇

게 하고 작업이라도 하면 그 약만 떨어져 나오지 말입니다

 

흠집은 흠집이 아닌 곳과 똑같은 두께로 약을 발라야지 말

입니다 벗겨져도 같이 벗겨지고 덮여도 같이 덥이는, 흠

집이 내가 되고 내가 흠집이 되는 저희 어머니도 서른셋에

아버지 보내시고, 그때부터 아예 아버지로 사시지 말입니

다 지난 휴가 때도 얼굴도 몇 번 못 뵙고 그나저나 이번에

효리 누나 춤 보셨습니까? 막 골반이 사시나무처럼 떨리

는데 말입니다 아, 다 바른 다음 말입니까?

 

이제 약이 이렇게 먹어들었으면 여기에 물을 한 방울씩 털

고 헝겊을 손가락에 두르고 같은 뱡향으로 밀고 나가야지

말입니다 김병장님 그런데 참 신기하지 말입니다 참말로

더는 못 해먹겠다 싶을 때, 이렇게 질기고 징하게 새카만

것에서 광이 낯짝을 살 비치니 말입니다 (光, 전문)

 

"라면 국물의 간이 비슷하게 맞는다는 것은 서로 핏속의 염분이 비슷하다는 뜻이야" (동지(冬至), 부분)

 

핏속의 염분이 서로 비슷한 사람...

그렇다면, 영혼이 내는 모음이 서로 비슷한 사람도 세상에는 있는 것 아닐까?

이 시의 冬至는 동음이의어 同志로도 읽을 수 있잖을까?

 

그런 동지라면...

손편지를 길게 주고 받으며,

그와 함께 낮달을 우러르며 '혼자 앓는 열'을 나눌 수도 있지 않을까?

그를 '미인'이라고도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혼자 앓는 열이

적막했다

 

나와 수간(手簡, 손편지)을

길게 놓던 사람이 있었다

 

인천에서 양말 앞코의

재봉 일을 하고 있는데

 

손이 달처럼 자주 붓는 것이

고민이라고 했다

 

나는 바람에 떠는 우리 집 철문 소리와

당신의 재봉틀 소리가

아주 비슷할 거라 적어 보냈다

 

학교를 졸업하면

인천에 한번

놀러가 보고 싶다고도 적었다

 

후로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종이에

흰 양말 몇 켤레를 접어 보내오고

연락이 끊어졌다

 

그때부터 눈에

반달이 자주 비쳤다

 

반은 희고

반은 밝았다 (인천 반달,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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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09 0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09 04: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3-01-09 17:37   좋아요 0 | URL
메일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