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파농 역사 인물 찾기 13
알리스 셰르키 지음, 이세욱 옮김 / 실천문학사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왜 다시 '프란츠 파농' 인가.

1. 닥터 노먼 베쑨
2. 케테 콜비츠
3. 주덕해
4. 뇌봉
5. 여운형
6. 랭스턴 휴즈(할렘의 세익스피어)
7. 아그네스 메들리(세계와 결혼한 여자)
8. 상해의 조선인 영화황제, 김염
9. 부에나벤투라 두루티(어느 한 무정부주의자)
10. 체 게바라
11. 스콧 니어링
12. 비노바 바베
13. 프란츠 파농
14. 바드샤 칸
15. 문익환
16. 간디

이 책들은 실천문학사에서 <역사 인물 찾기>란 시리즈로 내놓은 책이다. 체 게바라, 간디정도는 누구나 알 만한 인물들이지만 나도 최근에야 알게 된 인물들도 있고, 처음 듣는 이름도 몇 된다. 하긴 세상에는 피었다 진 꽃만큼의 전기가 있을 테니까, 그 사람들을 내가 알아도 그만이고 몰라도 그만일게지만... 내가 전기를 쓴다 한들 누가 읽고 나를 기억할까 말이다.

프란츠 파농은 정신과 의사이며, 훌륭한 저작들을 집필한 저술가였고, 행동하는 지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상가의 면모를 지닌 사람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프란츠 파농이 이런 직업을 가지고, 이런 삶을 살다 갔다는 건 어렴풋이 알게 되었지만, 기실 그 당시의 프랑스와 알제리는 어떤 상황이었는지 명확히 그림이 그려지지 않고 흐밋하게 뿌얘진 풍경이 떠오를 뿐이다. 이 책은 파농의 평전인 만큼, 그의 삶을 객관적 자료들로 뒷받침하는 데 힘을 쏟다 보니 잡다한 사건들도 상당수 지나치게 세밀할 만큼 기술되고 있고, 그 전거들을 주로 옮겨 놓아 파농의 생명과 같은 정신을 놓치고 있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우선, 이 책을 읽고 난 성과 중 가장 큰 것은, 내가 갖고 있던 파농에 대한 그림을 완전히 다시 그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난 프란츠 파농이란 복사물을 <강촌 유원지>에서 읽었다. 대학시절 MT를 통해서 프란츠 파농과 사르트르의 글을 접했던 것이다. 그 때 내 머릿속에 각인된 프란츠 파농은 폭력의 정당성을 증명하려는 선배들의 우상이었던 것 같다. 지금의 대학생들이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이십 년 전 대학을 다녔던 우리는 옆집 아저씨가 우리의 <의식화 학습>을 신고하지 않을까 눈치를 보며, 미행을 따돌리는 스릴러의 주인공처럼 선배 자취방과 곰팡내 나는 중국집 으슥한 골방이나 모처럼의 엠티의 민박집에서 소위 <학습>을 했다. 식민주의 국가의 세뇌적 선전에 가뜩이나 주눅들었던 신입생이었던 나는 선배들과의 <학습>이 엄청나게 부담스러웠다. 중뿔나게 시위에 앞장서거나 학생회 활동의 주축이 되지 못하면서, 선배들의 지식인의 투쟁 당위론과 폭력에 대한 정당성에 늘 딴지를 거는 꽤나 미운 후배였던 것 같다. 1학년을 마칠 무렵, 투쟁과 시위의 일상에서 일탈을 하고 말았고, 그런 고민들로 기말고사까지 망쳐 학사 경고를 받았던 웃지 못할 기억도 있다.

내게 프란츠 파농과 사르트르의 글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폭력의 정당성. 식민지 백성에게 폭력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 국가도 국가독점 자본주의국가이며, 세계 질서 속의 신식민지로서 저강도 정책의 경제주의에 따른 내정 간섭을 받는 국가임이 분명하므로, 신제국주의 본국인 미국에 대한 저항과, 군부독재 세력에 대한 반정부 운동은 애국이라는 논리를 받아들이기에는 내가 너무 착했던 것 같다. 전두환 장군과 함께 출범된 제5공화국의 교과서로 세뇌당한 고교 졸업생인 나로서는 창살에 갇힌 '학우'들의 사진이 <삐라>로 보였고, 대자보를 읽는 것 조차도 식은땀 나던 시절이 있었음을 이제서야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프란츠 파농을 이십 년이 지난 지금 읽은 감상은 그야말로 천양지차라 할 수 있다. 공포에 가득차 수 차례 복사본을 거친 흐릿한 프린트물을 읽고(결국은 모닥불 놀이를 하면서 그 프린트들은 태워버렸다. 그 시절엔 엠티촌도 검색을 왔기 때문에) 두려움을 이기려 객기를 부리며 폭음을 하던 스무 살의 나를 가엾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검은 피부, 하얀 가면>으로 정리할 수 있는 그의 생각은 오늘날도 <하얀 가면>을 뒤집어 쓰고파 몸살을 앓고 있는 우리의 허위 의식에 대한 날카로운 경고라고 할 수 있다. 식민지 대중들의 정신병적 심리상태를 천착하던 파농. 식민지 민중치고 제정신으로 살 수 있었던 자 있었을 리 없지만, 그의 의사로서의 업적은 그의 <폭력 예찬론자>로의 착각으로 파묻혀 버린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된다. 그는 폭력과 완전한 해체를 주장한다. 식민지에서 새로 문법적으로 만들어진 언어를 <크레올 어>라고 한다. 크레올 어를 쓰는 식민지 민중들에게 필요한 것은 폭력 혁명과 식민지의 완전한 해체 이외의 답이 있을 수 없지 않을까? 민중을 정치화하는, 그 시절 한완상의 <민중과 지식인> 논조로 말하자면 <즉자적 민중>을 <대자적 민중>으로 일깨우는 의식화는 <새로운 영혼들을 창조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 과정은 체계적이지 못하고 엉성한 교육과정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로 제3세계에 퍼부은 경고는 아직도 유효하다. 갈수록 기술의 불평등의 골은 깊어지고 고도화하는 현실을 볼 때, <축복받은 대지>를 원주민들로부터 약탈했던 과거를 가진 <대지의 축복받은 자들> 식민주의자들의 손아귀에 세계의 평화는 쥐어져 있는 듯 하다. <팍스 어메리카나>가 그렇고, 백호주의를 자처한 <호주>가 그렇다. <저주받은 자들>의 존재 자체가 그 언어와 함께 날마다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군사 독재 정부가 치사한 밀실의 야합으로 사라져 버린 특이한 정치 구조를 가진 한국이란 나라. 아직도 서울의 가장 땅값 비쌀 만한 곳에는 미군들이 세금 한 푼 내지 않고 놀이터를 갖고 있는 신제국주의 점령지. 대통령이 국군의 통수권을 가진다는 거짓말을 사회책에서 가르치는 희한한 나라. 국가의 폭력과 역폭력이 절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우리에게 <파농>의 독서는 <미래를 읽는 나침반>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는 식민지 시대, 전쟁 시대, 독재 시대, 지금의 과도기까지... 우리 역사를 구성해 온 굴종과 치욕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우리는 <해방>의 길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므로...

파농의 글들은 아직도 유효하다.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 <검은 피부, 하얀 가면> 같은 책들을 읽는 것도 상당히 의미있는 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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