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굴참나무 숲에서 ㅣ 서정시학 시인선 63
이건청 지음 / 서정시학 / 2012년 2월
평점 :
거기 나무가 있었네
이제는 무너져 흩어져 버렸지만
등치마저 타 버려 재가 돼 버렸지만
금관악기 소리로 퍼지던 노을
스쳐가는 늦기러기 몇 마리 있으리
귀 기울이고 다가서 보네
까마득한 하류에 나무가 있었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이건청, 하류, 부분)
내가 이건청을 읽은 것은 '하류'란 시에서다.
삶의 하류... 노년기쯤일까?
그 나무가 기억하는 금관악기 소리로 퍼지던 노을의 시절...
이런 공감각을 부추기는 아름다움이 남아있다.
젓갈 가게에 싸인
드럼통들을 찾아와
드럼통 속 새우와 참게들에게
풍랑의 바다 소식을 전하면서
곰삭은 황혼도 조금씩,
밀어 넣어 주고 있구나,
아주 잊지는 않았다고
젓갈로 익더라도 서로 익지는 말자고
밤새 속삭여 주고 있구나
곰소 염전 곁 객사의 사람도
내소사 전나무 숲 위에 뜬
초롱초롱한 별도 몇 개
꿈속에 따 넣으며
쓰린 잠을 자는데,
소금을 끌어안고 잠자며
젓갈로 삭아가고 있는데......(곰소항에서, 부분)
젓갈을 보면서,
우리네 삶도 소금을 끌어안고 잠자며 젓갈로 삭아가듯 시난고난한 것인데,
그래도 그 잠 위로는 초롱초롱한 별도 몇 개 꿈속에 따 넣는 것임을
읽어주는 다사로운 맘씨가 고맙다.
밤 깊고
안개 짙은 날엔
내가 등대가 되마.
넘어져 피나면
안 되지.
안개 속에 키 세우고
암초 위에 서마.
네가 올 때까지
밤새
무적을 울리는
등대가 되마.(네가 올 때까지, 전문)
삶은 탄탄대로인 적이 거의 없다.
진정 삶은, 밤 깊고 안개 짙은 날, 항해하는 사람의 심사와도 같다.
그럴 때, 나를 기다리며,
밤새 안갯속에서 '기적'을 울려주며 나를 기다려주는 등대를 자처하는 그대가 있다면,
삶은 그런 무람하게 치댈 수 있는 '비빌 언덕'의 위로가 있어만 준다면,
어떤 폭풍우 속이라도, 힘차게 넘겨낼 자신감이 생길 수도 있을 일이다.
길 하나가 /휘어진 곳/사과밭이 눈발을 부르는
저 비탈 어딘가에 /절간이 있고,
사나 해나를 위해 /천년동안 암반을 들쳐 메고 서 있는
여자가 있다고/ 한다.
저무는 산/ 하나나 둘/ 아니, 아니/ 사내 하나를 위해
저 산맥의 연봉 모두를/ 펼쳐 들고/ 풍설 속에
화엄의 날을 부르고 있는/ 여자가 있다고 한다.(선묘, 전문)
그런 여자가 있다면,
어떤 고난도 이겨내고 뜻을 이뤄낼 수 있는 '의상 대사'의 결기보다 더한,
단단한 자신감으로 항상 웃으며 살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인생의 '하류'에서는 삶이 날마다 휘청거릴지라도,
굴참나무 숲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시인 역시,
등대처럼 기댈 무언가를 찾으며 오늘도 밤을 하얗게 새울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