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걸의 시집 - 상처받고 응시하고 꿈꾸는 존재에게
은유 지음 / 청어람미디어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인생 40을 불혹, 혹하지 않는 나이랬다.

공자가 살던 2500년 전 이야기다. 1세기 경, 아테네의 평균 연령은 19세였다던가...

불혹은 살만큼 살았단 이야기였을지 모르겠다.

 

평균 연령이 80을 넘긴 현대에 불혹은 70이 넘어야 가능할까?

그렇지만, 어쨌든... 인간의 몸은 40이 넘으면 퇴화를 시작한다.

면역 체계가 약해져 감기같은 질병이 집을 삼아 드나들고,

피부는 중력의 영향을 받아 아래로 아래로 질주하려 애쓰며,

보이는 것도 어른거리며 장애를 받고,

무엇보다 뇌의 연합령에서 이뤄지는 온갖 반응에 대한 신경의 연합 활동에 장애가 온다.

단어가 막히고, 고유명사가 막히고, 사고의 매끄러운 연관관계가 마구 뒤섞이기도 한다.

다만, 지혜란 것이 만들어내는 것은,

시간 순서대로가 아닌, 인과관계 비슷한 것에 따른 새로운 사고의 도출이 가능해지는 나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나이에 읽는 시는 젊은 시절 읽던 그것과 다를 수밖에...

 

사십대 문턱에 들어서면

바라볼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기다릴 인연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안다

아니, 와 있는 인연들을 조심스레 접어두고

보속의 거울을 닦아야 한다.(고정희, 사십대 부분)

 

이런 시를 읽으면서 마음이 묵지근해지면서 고개를 주억거린다면, 사십대... 맞다. ㅎㅎ

 

눈물 속으로 들어가 봐

거기 방이 있어

 

작고 작은 방

 

그 방에 사는 일은

조금 춥고

조금쓸쓸하고

그리고 많이 아파...

 

아프니? 많이 아프니?

나도 아파 하지만

상처가 얼굴인 걸 모르겠니?

우리가 서로서로 비추어 보는 얼굴

네가 나의 천사가

네가 너의 천사가 되게 하는 얼굴(김정란, 눈물의 방, 부분) 134

 

굳이 40대로 일컫지 않더라도...

서로서로 비추어 보는 얼굴에서,

위로를 받고,

그리고 그 위로는 네가 나에게 주는 게 아니라,

목도리 속의 온기처럼

원래 너에게 소속되어 있던 것임을 깨닫게 되기도 하는 나이.

 

이 책에선 한국 여성의 삶이 아주 적나라하게, 또 재미있게 등장하기도 한다.

물론 그 삶이 비린내 풀풀 풍기는 바닥의 삶은 아닌 것이지만,

여느 집에나 다 있을 음식쓰레기 통 옆의 구정물 몇 방울처럼,

삶에서는 당연히 따라다니는 상처, 허전함, 외로움들이

삶의 냄새와 함께 가득 풍긴다.

 

그 삶이 외로울 때,

너무 외로워 지치려고 할 때,

시를 읽어서, 그럼으로써 조금 더 삶의 고독을 고양시킬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물론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로 들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소리를 듣고도 눈물 펑펑 흘릴 수도 있는 노릇.

 

나는 가수다~ 같은 방청석에서 눈물을 핑 돌리다가 결국 흐느껴 우는 관객은,

그 가사를 통해 카타르시스와 공감을 만끽하는 장면에 맞닥뜨린 것과도 같이,

어쩌면 한 편의 시를 통해 삶의 비의에 가까이 가게 되어 행복한 독자도 생길 수 있다.

 

바닥을 본 다음, 그것을 깊이로 만드느냐 추락하느냐는 개인의 능력이다.(87)

니체는 금단의 땅에서 열매를 구하라고 했다.

 

이렇게 작가는 삶의 힘든 고비를 넘기 위해 금단의 땅, '사막'에서 우물을 파고 두레박을 길어 올리기 위해 시를 읽었다.

 

사랑이 고통일지라도 우리가 고통을 사랑하는 까닭은

고통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감내하는 까닭은

몸이 말라 비틀어지고

영혼이 꺼멓게 탈진할수록

꽃피우지 못하는 모과가 꽃보다 지속적인 냄새를 피우기 때문이다(김중식, 모과, 부분)

 

사랑의 형식은 하나만이 아니다.

결혼에 골인하는 것이 사랑의 목적이라 착각하는 청춘들이라면 결혼이 사랑의 완성이라 여기겠지만,

결혼하는 순간, 사랑은 변질된다.

나이가 들수록...

남녀의 결합에서 오는 열락의 순간에서 느낄 수 있는 사랑보다는,

모과처럼 지속적인 냄새를 즐길 수 있는... 꺼멓게 탈진하는 영혼처럼 꽃피우지 못할지라도...

사랑하는 것 자체에서 아름다움의 의미를 발견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사랑이 그녀를 밑바닥에 이르게 한다

그녀의 텅 빈 육체 안엔 이제까지의 그녀가 아닌 다른 영혼이 심어진다(이선영, 사랑하는 두 사람, 부분)

 

사랑은 결혼을 목적으로 달려가는 버스가 아니다.

사랑엔 종점이 없다.

사랑이 지나가는 정류소들에서 타고 내리는 승객들의 낯은 모두 심심하기 짝이 없다.

사랑을 얻은 사람은, 다른 영혼으로만 사랑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이 책의 서문에(12쪽) '정신의 우물가에 앉아 한 삼십 분씩 시를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는 구절이 나온다.

정신의 우물가...라는 말이, 참 좋았다.

아마, 작가는

<인간은 자기가 어떻게 절망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알면 그 절망 속에 살아갈 수 있다>는 벤야민의 말을 떠올리기 전에,

절망 앞에서 그 절망을 끌어안을 '정신의 우물가'를 찾아 방황하는,

어린 왕자의 마음이었을지 모르겠다.

 

어린 왕자가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던 곳이 <사막>이었음은... 우연한 설정이었을까?

 

"진실의 사막에 온 것을 환영하네."

영화 매트릭스에서 가상세계를 박차고 나온 네오에게 모피어스가 건넨 말,

나야말로 모래알 같은 진실에 발이 뜨거워 죽겠다.(19)

 

작가는 글을 쓰면서, 자신은 불행의 언저리에도 가보지 않았던 사람이었음을...

정말 가슴 저리는 불행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들은, 말하는 것 자체로도 얼마나 몸을 움찔거리며 트라우마에서 고통받는지를,

글쓰기 강좌를 통해 배우게 되었다.

작가가 쓴 글들은 신형철 같은 비평가의 글처럼 완성도가 높지 않다.

그렇지만 작가의 글들은 그런 비평가가 갖지 못하는 '자유분방한 형식' 속에 질펀한 '감성'을 풀어 놓았다.

블로그에 실렸던 글들이 누릴 수 있는 <진실에 접근하는 사유의 한 방식>을 작가는 찾고 있는 중이며,

그 도중에서 '시'들을 인용한 것이다.

 

이 형식 자체가 하나의 '은유'이었음을, 작가는 예명을 통하여 강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고쳤으면 하는 부분 둘

 

95. 녹음기 틀어 놓은 것처럼 토시하나 안 틀리고... '토씨'다. 최현배 선생 같은 이는 '조사'를 '토씨'라는 말로 썼다.

 

71. 좀 남사스러운 일이다... '남사스럽다'는 '남세스럽다'의 비표준어라고 나와있다. 뜻은 '남에게서 조롱이나 비웃음을 받을 만한 데가 있다'는 말이며, '남에게 우세스럽게 놀림받을 만 하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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