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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김남주 옮김 / 마음산책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원제목 pseudo의 영문 해석은 이렇다.
not genuine but having the appearance of
가짜의, 모조의, 거짓의... 이런 뜻인 모양이다.
비슷한 말로 '사이비'도 있겠다.
이 책을 읽은 지금 든 생각.
로맹 가리라고 불린 에밀 아자르(?)는 도대체 이 책을 왜 썼을까?
그 머릿속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이는 없기에,
왜? 스스로 입에 권총을 틀어박고 발사해 버린 자에게 뭘 묻겠는가...
왜 그의 삶 전체를 쓰면서, '사이비'란 '전부 가짜야~'란 이름을 붙였을까?
인간은 누구나 가면을 쓰고 산다. '페르소나'란 말을 쓰듯, 인간의 인격 역시 하나의 가면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띤 '민족'의 가면,
정자와 난자를 제공한 '부와 모'의 가면,
어디서 태어났는가에 따른 '지역'의 가면, '언어'의 가면, '풍속'의 가면...
삶의 시작과 동시에 그 가면은 늘 붙어 다니게 마련.
그렇지만, 에밀 아자르의 '사이비 의식'은 어디서 온 것일지 조심스레 살펴볼 필요도 있다.
1914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폴란드를 거쳐 프랑스 땅에 정착한 하층 이민자라는 척박한 여건에서 성장해
마침내 자유 프랑스군의 공군으로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고,
'유럽의 교육'으로 비평가상을, '하늘의 뿌리'로 공쿠르 상을 수상하며,
유능한 편집자 레슬리 블랜치, 은막의 주인공 진 시버그와 결혼 생활을 하고,
프랑스 외교관으로 유럽과 미국 대륙을 누비고,
여러 편의 시나리오를 쓰고 두 편의 영화를 감독하는 치열하고 화려하게 꽃핀 삶,
요컨대 성공한 군인이자 작가이자 외교관이자 기혼자이자 감독으로서의 삶이,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위장이었다면,
그 이면의 채워지지 않는 내적 허기와 정체성에 대한 근원적 혼란과
문학의 본질에 대한 회의와 인간의 허위성에 대한 혐오는 차라리 진실이라 할 만 하다.(227)
이렇게 적어 놓고 봐도, 도무지 그의 근원적 고뇌는 짚어보기 힘들다.
그의 삶은 1차, 2차 세계대전의 한복판을 관통해온 삶이었다.
그 세계대전의 '허위적 진실'을 마주하면서 그의 존재는 늘 의심받지 않았을까?
인간은 왜 인간을 죽일 수 있는 걸까?
사랑이란 이름으로, 정의란 이름으로 왜 인간은 인간을 떼죽음에 이르게 하는가?
도대체 인간이 나누는 '기준'은 얼마나 허접한 것인가?
유대인인 인간과 아닌 인간을 나누는 '기준'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것인지...
그 시대를 상상하지 않고서는 그저 그를 '미친 넘'으로 취급해서 해결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작가란 인간의 고통을 이용하고 그 피를 빨아먹는 자라고...
"나는 에밀 아자르예요!" 하고 나는 내 가슴팍을 두드려대며 외쳤다.
"유일하고 독특한 존재란 말이에요! 나는 내 작품의 아들이자 아비이기도 해요!
나는 아무에게도 빚진 것이 없어요! 나는 나 자신의 저자이며 그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어요.
나는 진짜예요! 속임수가 아니라고! 나는 위장이 아니에요!
나는 고통받는 인간이에요. 더더욱 고통받기 위하여, 내 책에, 세상에, 인류에게 더 많은 것을 주기 위해 글을 쓰는 인간!
중요한 것은 작품뿐이에요."(203)
이렇게 아무리 강변한다 해도, 진실은 드러나지 않는다.
이성을 잃을 때면 나는 언제나 차분해진다.
왜냐하면 내가 차분해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바로 이성이기 때문이다.(192)
민족간, 개인 간의 싸움이 서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다는 주장은 틀렸다.
그들은 서로 이해하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다.(32)
이런 역설은 우리 삶의 도처에서 가득하다.
정치에 무감각한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대답은 똑같다.
정치에 신경을 꺼야 차분하게 살 수 있으니까.
이성이 정치에 신경쓰는 순간, 열받아서 살 수 없으니까...
그렇다. 인간이 이성의 이름으로 저지른 해악을, 그 시대를 생각해 보면... 이성은 죽일놈이다.
서로 다르다고, 저놈은 나랑 다르고 저열한 놈이란 것을 이해하기 때문에, 싸움은 시작된다.
박사님, 이건 끔찍한 일이에요.
내가 왜 내 정체성으로부터 도망치려 그렇게 애쓰는지,
어째서 오줌을 지릴 정도로 공포에 시달리고 고통스러워하는지,
왜 그렇게 유전을 거부하고 죄의식을 느끼는지를 이제 깨달았습니다.
'내가 유태인이기 때문입니다.'
박사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스스로를 증오하고 나 자신에 대해 인종 차별적인 생각을 갖게 된 겁니다.(95)
한국에서도 그렇다.
영화의 조폭은 으레껏 쌍스러운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하거나,
느물거리면서 섬뜩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한다.
특히 전라디언~운운하며 전라도 사람들을 폄훼하는 풍토는 '유태인'에 대한 편가름에 다르지 않다.
어쨌거나 운명의 입장에서는 알다시피 모든 이름이... 가명인 셈이오.
당신의 비단뱀이 생쥐를 먹을 때 생쥐에게 이름이 뭐냐고 묻지 않는 것처럼 말이오.(78)
익명성, 인간을 편가르는 모든 개념의 무의미함...
이런 것들을 극단적으로 고뇌할 때, 모든 이름은 힘이 없다. 의미가 없다.
오로지 폭력의 수단으로 쓰일 뿐...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살 수 있나?
미치지 않고? 미치겠다~ 어휴~
철저히 가면을 쓴 세상 속에서 위장하는 것이야말로
삶의 실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10)
그래서, 가면의 생...이 탄생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