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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 박찬일 셰프 음식 에세이
박찬일 지음 / 푸른숲 / 2012년 7월
평점 :
마르셀 프루스트란 작가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과거 회상으로 이루어진 대작이다.
그 이야기 속에는 어린 시절 감각했던 망막의 '촛불', 또는 부엌에서 맡았던 향기,
침대보의 보드레한 촉감, 마들렌의 맛과 부드러움... 이런 것들을 떠올리는 에피소드들로 가득하다.
요즘 과학자들의 연구 대상 중 '뇌'의 연구가 대세를 이룬다고 한다.
결국 모든 과학은 '인간이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한 것일지 모른다.
일본 텔레비전을 본따기 좋아하는 한국 텔레비전에서는,
툭하면 먹을 거리를 조리하고 맛보는 프로그램을 많이 양산했다.
전국의 맛집을 찾아 다니면서 소개하고, 그 맛의 세계를 국민에게 대신 보여주는 듯 했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거의 전부가 '사기'였음이 밝혀졌고,
그 사기극의 전말은 '트루맛쇼'라는 영화를 통하여 공개되었다.
물론 방송국들은 이 영화를 스크린에 걸지 못하게 상영중지가처분신청을 했고, 명예 훼손이 아니라는 판결도 나온 걸로 알고 있다.
도대체 인간에게 '맛'이란 무엇일까?
한국인들은 먹고 살기 힘들어서, 미역국과 김, 계란 프라이 정도면 호의호식이라 여기던 시절이 겨우 지나갔는데,
왜 이렇게 맛에 안달하고 있는 걸까?
그런 맛 이야기에 도전한 사람도 많은데,
그의 '짜장면'에 반해서 읽게 된 성석제의 맛 이야기는 함량 미달이어서 밥맛~이었고, ㅋ~
(밥은 맛있는데... 아무래도 밥맛~이란 말은 반찬 없이 밥만 먹을 때, 맛이 없다~는 뜻인 듯 싶다.)
박찬일이란 기자 출신 이탈리안 레스토랑 셰프의 이 책은
사이즈도 제법 귀염성이 있고, 노란 색깔도 매력적인데,
무엇보다 글맛이 쫄깃하고 고소하여 독자를 사로잡는다.
그의 글맛을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서문에 등장한 초콜릿맛이랄까?
인생이란 한번 사는 것.
즐기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어?
인생의 쓴맛도 때로는 단맛과 만나면 기막힌 맛이 된다구.
초콜릿처럼 말이야.(10)
그래. 초콜릿의 맛은 카카오의 쓴맛만이어선 안 된다. 거기 단맛과 합쳐진 오묘한 경지가 있어야 초콜릿인 셈.
내가 난 곳은 충청북도 산골이지만, 어려서부터 자란 부산이란 도시는 참으로 근본없는 도시다.
일제 강점기 이전부터 항구로 열리면서(1876년 강화도 조약), 부산포는 대일 무역의 관문이 되었고,
일제 강점기엔 온갖 물산이 드나드는 '기찻길'의 대문으로 부산항과 부산역은 등을 마주대고 있다.
전쟁기에도 일본을 통하여 온갖 군수품이 부산항, 부산역으로 몰려들었고,
여기서 빼돌린 물건들로 시장이 서기도 했는데, 지금도 그 이름도 인터내셔널한 '국제 시장'이 그것이다.
이런 가난한 도시, 척박한 도시여선지, 먹거리 문화가 풍족하진 않다.
짠지에는 남자 어른 손가락 굵기의 멸치가 툭 튀어 나오기도 하고,
젓갈 비린내야 예사다.
톡 쏘는 제피 냄새 가득한 열무 김치도 정말 독특한 맛이고,
개장국 같은 데 넣는 산초, 방아의 향도 외지인들에겐 지극히 쏘는 맛의 향신료다.
부산 맛의 대명사라면 아무래도 '돼지 국밥'인데,
요즘 파는 '따로 국밥'(국과 밥을 따로 주는) 보다는,
큰 솥에 밥과 돼지 고기(돼지 수육보다는 온갖 내장, 족발 등 부산물이 가득한)를 넣고 푹 삶아낸 죽같은 것을 일컫는다.
그 집 옆에 가면 동네가 다 누릿한 냄새로 찌들어 보일 정도였는데, 요즘엔 그런 누린내를 빼느라 애들을 쓴다.
그런 부산 맛을 셰프는 이렇게 쓴다.
그리하여 부산에 조르지 않는 애인이나 묵은 친구 하나쯤 있었으면 하게 빌게 되는 것이다.
우울할 때면 기차를 타고 훌쩍 들르고 싶도록...(148)
KTX로는 서울서 3시간이면 넉넉히 올 수 있으니,
지난 주처럼 국제영화제라도 할 계절이면 부산 나들이를 꿈꾸는 사람도 많은 모양이다.
조르지 않는 애인, ㅋ~
꿈도 뚱뚱하다. 조르지 않는 애인은 기다리지도 않는 법이거늘...
묵은 친구라면 그건 좋다. ^^
박찬일의 입담은 구수하면서도 맛깔스러운 향취를 잘 담아내는데,
랍스터처럼 이런 맛은 어떨까?
랍스터는 세월의 맛이다.
바다의 풍상과 온갖 생명들의 아미노산과 휘발성의 지방산이 살에 녹아서
향을 뿜고 맛을 낸다. 랍스터는 오래 산다.
그리고 그 세월 동안 자신이 먹었던 종족들을 살에 기억시켜 놓았으리라.(181)
아마 내가 랍스터를 안 먹어 봤을 때라면,
캬, 이거 소주 안주로 딱인 거 아닐까~ 이랬을지 모른다. ㅋ~
한 분야에 몰두하며, 그것이 그대로 문학이 되는 모야이다.
토끼 고기의 비릿한 맛을 중화시키려 카카오를 쓴다는데,
대지의 기운, 흙냄새, 먼지 바람, 새멱이슬 같은 게 카카오의 본래의 맛과 냄새야.
잘 맡아봐.
아프리카의 카카오는 무언가 건조하고 대륙적이고,
아메리카의 카카오는 습하고 진하며 나무 냄새가 많이 나.
둘 다 태양을 닮은 맛이라는 건 공통점이지.(194)
맛 하나에서도 인생과 세계 만물상이 다 비치어 든다.
그런 경지가 달인의 경지인지도 모른다.
내가 하는 일, 하나하나에도 다 세상만사가 겹쳐들 때가 있다.
사는 일은 그런 거다.
이런 책 한 권 만나면서도, 세상의 축도가 들어있음을 느끼면서, 반갑고 기껍게 읽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