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4
윤흥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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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 아홉 켤레. 권씨의 자존심은 그것 뿐이었다. 아니, 자존심이란 것을 가질 수 없게 하는 현실에 저항하며 안동 권씨라는 조선시대에는 한 끗발 했던 그걸 가지고 스스로를 좀 높게 보이려 했었다.

칠십년 대 도시 빈민의 삶. 그리고 국가 권력의 간섭과 인간의 파멸의 스토리를 재미있게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희극>의 범주에 넣을 만 하다. 특히 권씨의 강도 행각에서는 사뭇 여유와 웃음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을 희극이라고 볼 수만은 없게 하는 것은, 작품의 저류에 흐르고 있는 <페이소스>일 것이다.

'굿 바이 마이 프랜드'란 영화가 있었다. 병에 걸린 친구의 죽음을 친구는 신발을 바꿔 신음으로써 극복한다. 신발과 죽음. 사자밥을 차릴 때, 밥상에는 반드시 짚세기 한 켤레를 얹어 준다. 죽음과 신발. 비싼 양복도 입고 죽고, 지갑도 가지고 죽으면서 유서 옆에 가지런히 놓아두는 구두 한 켤레. 죽음과 신발 사에엔 어떤 함수 관계가 놓인 걸까.

구두는 신데렐라의 유리구두, 콩쥐팥쥐의 꽃신처럼 계급의 상승을 은유하기도 한다. 신발을 바꿔 신으면 계급이 바뀔 수 있는 것이다. 고무신, 그것도 다 떨어진 검정고무신이 어울릴듯한 처지의 권씨가 고집하는 반짝이는 구두는 언젠가는 나도... 하는 오기와 상승의지를 담은 은유이기도 하다.

윤흥길의 힘은 진지해서, 너무 진지해서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조금 비꼬고 조금 희화화해서 이야기로 엮어 낸다는 데 있다. 통일의 염원을 말하지 못하던 시대에 공산군 아들을 둔 할머니와, 피난와있는 국군 아들이 전사한 외할머니 사이의 갈등으로 비유한 <장마>에서 그랬듯이, 이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권씨는 비록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고 있지만, 그 시대에 말할 수 없던 것을 그는 충분히 담아내고 있다.

찰스 램과 찰스 디킨즈에 대한 그의 생각도 재미있었다. 불우한 유년기, 빈민에 대한 연민을 그린 두 작가. 그러나 램은 따스한 인간이었으나 디킨즈는 유복해진 후 차가워진다. 우리는 누구나 램처럼 살고자 한다. 그러나 사실은 디킨즈의 편에 더 가까운 이기심으로 무장되지 않았던가 하는... 지식인의 반성이 묻어나는 좋은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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