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치약 거울크림 문학과지성 시인선 401
김혜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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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은 김수영영영이고

김춘수는 김춘수수수이고

김종삼은 김종삼삼삼이고

왼발 다음엔 오른발

0 다음에 1, 2 다음엔 3이고

우 다음엔 울이라고


우는 빗줄기를 빗질하고, 울은 빗줄기를 써레질하고

우는 하얀색 운동화를 왼쪽에 신고

울은 하얀색 운동화를 오른쪽에 신고

나는 발잔등에 줄 끊어진 흰 새를 두 마리 덮고


그렇게 오도 가도 못했네(우가 울에게, 부분)

 

이 시집의 처음에 있으면서, 가장 인상적이던 시다.

이 시집을 몇 번 꺼내 집적대 봤는데도, 역시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렇게 오도 가도 못했을 그이의 마음이 오롯이 전달되어서 그랬나보다.

 

이 시집은 그렇게 내게 짠한 맘을 던졌다.

 

주체할 수 없이 몸이 커진다는 거...

다 죽어버릴 만큼 덩치만 크다는 거

이 햇별 작열하는 대로상엔 나밖에 없다는 거

나를 만나면 도망가는 것들밖에 없다는 거

걸어가면서 잠자는 거대한 회색곰처럼......

덩그러니 나 말고 아무도 없다는 거

거리에서 쫓겨나고 쫓겨나면서

점점 커진다는 거

내가 세상의 비명으로 꽉 차 있다는 거

그것밖엔 아무것도 없다는 거(어미곰이 불개미 떼 드시는 방법, 부분)

 

뭔가 말하고픈 게 가득한 그에게,

또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그에게,

세상은 자꾸만 낯설어 지는 것 같다.

마치 어미곰이 불개미 떼 앞에서 겪는 당황스러움이 그렇다고나 할는지...

 

덩그러나 나 말고 아무도 없다는 거...

 

그것의 고통을 현대인이라면 어느 정도 누구나 알고 있지 않을까?

 

슬픔을 참으면 몸에서 소금이 난다

짜디짠 당신의 표정

일평생 바다의 격렬한 타격에 강타당한 외로운 섬

같은 짐승의 눈빛


소금, 내 고꾸라진 그림자를 가루 내어 가로등 아래 뿌렸다

소금, 내 몸속에서 유전하는 바다의 건축


소금, 우리는 부둥켜안고 서로의

몸속에서 바다를 채집하려 했다


오늘은 일어나자마자 염전이 문을 열었다

나는 아침부터 바다의 건축이 올라오는 소리 듣는다


나는 몸속에 입었다

소금 원피스 한 벌(내 안의 소금 원피스, 부분)

 

김명인은 '소금 바다로 가다'에서 삶의 허무를 극복하려 애쓰지만,

시인은 아예 '소금'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결코, '나'를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듯,

'소금 원피스'를 입을지언정, 자신이 추구하고싶은 여성성은 놓치고 싶지 않은 간절함이 애절하게 전달된다.

 

찰칵

 

우리 몸은 모두 빛의 복도를 여는 문이라고

죽은 사람들이 읽는 책에 씌어 있다는데

 

당신은 왜 나를 열어놓고 혼자 가는가

 

당신이 깜빡 사라지기 전 켜놓은 열쇠 구멍 하나

그믐에 구멍을 내어 밤보다 더한 어둠 켜놓은 깜깜한 나체 하나

 

백합 향 가득한 광야가 그 구멍 속에서 멀어지네(열쇠, 부분)

 

열쇠를 바라는 마음,

이해가 간다고 하면 오해일까?

 

누구나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는 누구나 한 세상의 열쇠지만,

또한 나를 열어줄 당신을 기다리는 존재가 아닐는지,

또는 나를 열어준 당신에게 기대려는 존재가 아닐는지...

 

  그대에게만 가서 꽂히는/   마음 /  오직 그대에게만 맞는 열쇠처럼

 

  그대가 아니면/   내 마음 /  나의 핵심을 열 수 없는(김선우, 꽃 이라는 유심론, 부분)

 

그의 대작, '맨홀 인류'에서 제법 멋진 구절을 만난다.

 

   내 구멍 속을 조리할 때 쓰는 동사는 '끓이다, 굽

다, 찌다, 졸이다, 달이다, 태우다'이다. 이 동사들

앞에 쓰이는 목적어는 배춧속, 순대 속, 마음속 같은

'속'이다. 당신이 내 속을 조리한다. 양파 속 같은 내

텅 빈 곳을 잘도 조리한다. 나는 내 속이 타들어가는

것을 멈출 줄 몰라 늘 보이지도 않는 심지를 태우고

야만다. 내 속을 끓이는데, 이상하게도 내 마음에 탈

이 난다. 당신은 '+ 열'과 '+ 물'한 동사로 조리하는

데, 그 동사에 '+ 열', '+ 시간' 할수록내 구멍에서

연기가 솟아오르고 '끓다, 굽다, 찌다, 졸이다, 달이

다, 타다' 순으로 내 마음이 조리된다. 최후엔 항상

몸 전체가 탄다. 당신이 내 마음을 태우면 내 몸도 탄

다. 마음과 몸의 가림판이 녹아내린다. 녹아내린 것

이 다시 피어오른다. 고체가 기체가 된다. 참고로 말

하자면, 꽃은 기체다. 붉은 수증기 한 송이다. 마음은

조리법인 동시에 조리된 것의 상태다. 내 마음을 태

운 연기가 당신의 구멍 속을 밀고 들어가면 당신은

저리 가, 고약한 냄새! 젓가락을 던져버린다. 그렇다

고 조리되지 않은 생선회처럼 저며진 마음을 좋아하

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맨홀 인류, 부분)

 

시는 '부엌'과 '안방' 사이의 사랑방이라고 한다.

삶과 문학 사이의 어디쯤, 그 언저리에서

시인은 오늘도 우가 울한 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기도 하고,

울이 우한 장면을 말끄러미 지켜보기도 한다.

 

부엌에선 속이 끓고, 애가 닳고, 심장이 녹을 만큼 속이 타는데,

안방에선 태연하고 천연덕스럽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인류가 연속극을 보고 있다.

 

시는 그 사이, 사랑방에서,

애가 닳고 속이 타는 부엌의 사정을,

안방에서 들어주는 시간이 오기나 하려나~ 하면서,

오늘도 쉬 마려운 아이마냥 어쩔 줄 모르면서 우리 주변을 서성인다.

 

슬픔 치약이라도 입 한 가득 물고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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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10 2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9-10 2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12-09-13 08:15   좋아요 0 | URL
인터넷으로 국어사전 찾아보면 이런 특이한 경우, 활용형도 다 나온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