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깊게 읽는 즐거움 - 속도에서 깊이로 이끄는 슬로 리딩의 힘
이토 우지다카 지음, 이수경 옮김 / 21세기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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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담당하던 '교육'부가,

'사람을 팔아먹을 자원'으로 파악해서 '교육인적자원'부 였던 적이 있다.

지금 정부에서는 아예 그 부서를 없애고, 정치의 시녀로 만들려다가,

교육-과학-기술부라는 웃기는 짬뽕으로 기형적 부서로 된 모양이다.

 

교육은 당장 결과를 내는 일이 아니어서,

어떤 좋은 의도라도 '부정적 반응'밖에 도출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희한한 의도로 접근한 경우에도 '긍정적 반응'의 추억으로 남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지금 국어 교과서는 국가에서 정한(국정)의 틀을 벗어나, 다종다양한 사고를 담을 수 있게 되어있다.

획일성의 부정적 요인을 제거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국가가 만들지 않았다 뿐이지, 그것을 '검정'하는 절차를 통해 탈락시키고 하므로,

오히려 전보다 나아지지 못한 경우도 있다.

 

70년대 교과서로 배운 우리 세대는, 충무공 이순신과 무인들의 칭송, 민족 교육이란 미명하에 온갖 충성심을 다 담은 시조들로 도배된 국어책을 배워왔다.

그렇지만, 전국이 유일한 '국어'란 바이블로 공부한 덕에,

지금도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하는 민태원의 청춘 예찬이나,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 또는 '다정도 병인 양 하여 잠못 들어 하노라' 같은 시조를 읊조릴 수도 있다.

 

특히 수능 세대는 교재보다는 새로운 텍스트를 만나 이해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보니,

수업 시간에 한 텍스트를 골몰하여 다루는 것보다는, 다양한 텍스트를 빨리 읽고 소화하는 훈련이 중요한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 결과, 아이들은 수업을 듣지 않고도 일정한 성과를 거둘 수 있게 되었고,

과연 수업은 왜 하지? 이런 의문으로 교실은 잠자는 곳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런 현실에서 일본의 한 옛날 선생님이 '슬로 리딩'으로,

변변치 않은 전후 일본 상황과, 국수주의적 교재를 사용금지당한 현실에서 출발하였지만,

대단한 결과를 낳을 수 있었다는 보고는 읽어볼 만 하다.

물론, 그 학교가 사립이었던 특수한 점을 무시할 수는 없다.

 

수능 점수는, 원래 똑똑한 아이들이 훈련을 통해서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게 되어 있다.

부산의 경우, 해운대 신도시의 경우, 언어영역 1등급을 10%, 외국어 영역은 15% 정도 만드는 일은 쉽다.

그러나 내가 근무하는 중하위권 남학교의 경우 4%여야 정상인 1등급은 거의 2% 미만으로 떨어진다.

더 낙후된 지역에서는 거의 없다시피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현명하게 천천히, 빨리 달리는 사람은 넘어진다.(로미오와 줄리엣 중)

 

초등학생은 '도련님', 중고생은 '죄와 벌', 대학생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사회인은 '논어' 정도가 좋습니다.

장르는 서로 다르지만 각각의 세계가 있고,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가치관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41)

 

한 권의 책을 집중해서 탐구하고,

세상과 연결된 지점을 찾는 일은 큰 공부다.

그리고, 세상과 연결되는 탯줄을 갖는 역할을 할 것 같다.

 

'주입보다 추출'

 

이것이 하시모토 선생님의 모토다. ㅋ~

나도 한때 아이들의 쓰기, 표현을 중시하던 수업을 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 아이들이 아직도 연락을 한다. 맞다. 주입만 해서는, 남지 않는다.

느리게... 그러나 자기 생각을 추출하도록 수업하는 일... 배울 점이다.

 

'속도가 중요한 게 아니다'

 

오로지 속도와 점수 비교, 발전만을 일삼는 사고 방식으로는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내가 서있는 지점이 힘든 것도 이 부분이다.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왜 아이들에게 속도내서 나가도록 채찍질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나는 울고만 싶다.

아이들은 이미 엎어져있다. 채찍질한다고 나아갈 수준이 아닌 것이다.

근본적인 질문을 하면, 답이 돌아온다. 지금 그런 논의를 할 단계가 아니란다.

그럼, 나는 운다.

 

청년과 노인의 격절, 이는 오늘날 시작된 문제가 아니다.

격절은 상호 이해의 노력없이는 메워질 수 없다.

교사와 학생의 단절도 마찬가지다.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교사와의 교류가 저조한 것보다도

전혀 없었다는 것을 한탄하는 목소리가 많다.

한탄한다는 것은 원했는데도 실천하지 못했음에 대한 회한 때문인지도 모른다.(168)

 

'너희들이 열중하는 것 중 쓸데 없는 일은 없다'

 

아이들을 믿지 못하면서 나무라기만 하는 일은, 이해보다는 격절을 부추긴다.

하시모토 선생님이 '결과가 나와서 다행입니다' 하고 말했을 때,

그 학교에가 일본 최고의 명문 학교가 되어서 그렇다는 줄 알고, 나는 살짝 비위가 상했다.

그러나, 역시 하시모토 선생님이었다.

 

함께 은수저를 읽은 학생들이 환갑이 지나서도 모두 앞을 보고 걷고 있어요.

그것이 무엇보다 기쁩니다.

그것을 알 수 있어서 정말로 좋았습니다.

결과가 나와서 다행입니다.(191)

 

아, 졸업하고 나서야 비로소 1:1 만남이 시작되는 수업.

그리고, 환갑이 넘어서 나아가는 모습을 보고서야,

결과가 나와서 다행이라고 말해주신 노스승이 계셔서...

나는 눈물을 머금고, 다시 신발끈을 죄며 갈 길을 가늠해 볼 힘을 얻는 거다.

 

교실의 한 순간도, 헛된 순간은 없다.

아이들이 자라는 데 도움을 주거나,

아이들이 망가지는 데 도움을 준다.

내가 선 곳은 그런 곳이다.

 

 

----------- 수정할 곳

 

83쪽.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유례'로 수정

 

175쪽. 닭도 회에서 떨어질 때가... '홰'로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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