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신성한 관계 ㅣ 사립탐정 켄지&제나로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켄지&제나로 시리즈의 3권.
이 소설의 제목, '신성한... sacred'이 가진 의미를 곰곰 생각하면서 책을 읽었다.
역시 여름엔 장르 소설~이라고 외치는 친구가 권해준 책인데,
장르 소설은 '제한된 범위 내'에서 해결책을 제시하기 때문에,
이런 무더위를 식히기엔 제격이다.
실종 사건 청부,
그 사건을 맡았던 선배의 묘연한 행적,
그리고 속속 드러나는 폭력과 살인 앞에서 마주치는 두 사람의 사랑...
도대체... '신성한' 건 뭐야?
이러면서 읽게 된다.
이 책에선 '팜므 파탈'로서의 여성,
완벽한 미모와 기술(technique in bed with her... ㅋ~)을 가진 그이름도 환장적인 '데지레'...가 남성 독자의 혼을 쏙 뺀다.
이 소설을 다 읽고는 셰익스피어가 떠올랐다.
여자를 교만하게 하는 것은 그 미모이며 찬양받게 하는 것은 그 덕성이다.
그러나 덕성과 미모를 겸비하면 신성을 가진 것이다.(셰익스피어)
에필로그에서 셰익스피어의 연시집이 등장하기도 한다.
장식된 아름다움은 범죄...
장식도 가식도 없는 아름다움은 성스러우며,
인간의 존경과 숭배를 받을 자격이 있다.(436)
그 성스러움 앞에서 주인공 켄지는 '두려움을 느끼고 겸허해졌다'고 말한다.
'그로써 완벽해졌다'고...
성스러운 사람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과 겸허함... 그리고 완벽을 자랑하는 사랑 이야기.
"저기 좀 봐."
앤지가 검은 하늘을 가로지르는 하얀 유성을 가리켰다.
유성은 꼬리를 태우며 시선이 닿지 않는 먼 곳으로 곤두박질치다가 이내 소멸되고 말았다.
목적지를 3분의 2나 남겨둔 채 허무 속으로 내파되고 만 것이다.
주변의 별 몇 개가 별 일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지켜보았다.(432)
문제의 해결을 앞두고 이런 아름다운 장면이라니...
목적지를 3분의 2나 남겨둔 '장식된 아름다움' 하나가, 허무 속으로 사라져가는 장면과 오버랩된 장면.
작가 데니스 루헤인은 상당히 낭만적인 성향이 강하다.
장르 소설이 가지고 갈 수밖에 없는 한계인 '도식적 스타일'을 루헤인은
유머스런 러브 스토리의 라인을 나란히 놓아둠으로서 가볍게 뛰어넘으려 한다.
물론 그 시도는 성공한다.
데지레...
그녀 역시 자신의 삶의 찰나성을 꿰차고 있다.
<장식된 아름다움의 범죄>에 대하여...
사진은 개뿔이에요.
그건 분리된 찰나에 불과하죠.
엄마는 그냥 아름다운 게 아니라 우아함의 구현체이자 그 자체였어요.
게다가 무조건 사람을 사랑했죠.(388)
두 남녀 형사는 문제 해결과 함께 애정 나누기에도 성공한다.
거기서도 '신성한 관계'를 발견한다.
앤지는 단순한 파트너가 아니다.
그저 제일 친한 친구도 단순한 애인도 아니다.
그녀는 물론 그 모든 것이지만,
동시에 그 이상이다.
그날 사랑을 나눈 후, 비로소 나는 우리 관계의 본질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어느 모로 보나, 어린 시절 이후 우리 사이를 채우고 있던 것은 그냥 특별한 관계 정도가 아니었다.
그건 신성한 관계였다.
앤지는 내 모든 것의 시작이자 종착역이다.
그녀가 없다면, 그녀가 어디 있는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면,
난 반쪽이 아니라 완전히 제로가 되고 만다.(381)
이런 사람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많겠지만, 파트너로서의 앤지를 만난 그의 마음이 얼마나 가득 찼을지...
상상하는 일만으로도 행복했다.
의뢰인 트레버 스톤의 '슬픔론'도 재미있다.
"슬픔은 육식성이라오.
깨어있단 잠들어있든, 이겨내든 굴복하든 끝없이 사람을 갉아먹지.
그러다가 어느날 아침, 문득 다른 모든 감정들,
그러니까 기쁨,질투, 탐욕, 심지어 사랑까지 모두 슬픔에 잡아 먹혔다는 사실을 깨닫는 거요.
결국 슬픔만 남아 무기력한 우리를 노예처럼 혹사하는 게지."(24)
작가의 이야기겠지만...
장르 소설에서 만나는 이런 재미있는 철학적 위트는 '보너스'를 받는 쾌감을 준다.
이런 슬픔론에 곁대어, 인간의 정신에게 '상처'란 것은 얼마나 고통스런 것인지,
설명하는 구절 역시 예술이다.
인간의 영혼은 인간의 살갗보다 붕대를 감아주기 어렵다.
수천 년간의 연구와 경험으로 육신의 치유는 훨씬 쉬워졌을지 모르겠지만,
인간의 정신에 대해서라면 모눈 하나도 더 나아가지 못한 것만 같았다.(110)
이마 주름을 베개에 묻은 채 살짝 벌어진 입수로 잠든 앤지를 보며 이런 연민을 느끼는 켄지에게서
벌써 사랑의 향기가 묻어남을 본다.
사랑은 연민에서 우정으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니까...
모눈 하나도 더 나아가지 못한 의료를 한탄하는 마음은, 벌써 앤지의 영혼을 어루만져 주고 싶은 켄지의 애정이니까...
범인을 찾던 콤비 앞에 나타난 제이.
그의 슬픔론도 독자의 심사를 파헤치고 소금을 친다. 쓰라리지만 매력적으로...
"슬픔은 가슴 속에 사는 게 아냐.
그건 감각 속에 살고 있어.
때때로, 난 이 코를 잘라 그 애의 냄새를 맡지 못하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떨쳐낼 수만 있다면 이 손가락 마디를 모두 잘라내고 싶어."(245)
짝을 잃은 앤지 역시 같은 수작이다.
"그냥 가끔, 그 사람 목소리가 들려요.
너무나 선명해서 내 옆에 앉아 있는 것만 같은데,
그럴 땐 다른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네요."
피비린내 진동하는 장르 소설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냄새와,
온기 속에서 느낄 수 있는 다사로움은,
독자를 잠시라도 현실에서 분리시켜 가만히 눈을 감고 사랑의 '신성함'에 기대어 보게 한다.
데이스 루헤인은 독자에게 그런 보드라운 마음을 회복시켜 주는 '힐링 케어'를 제공하는 소설가여서 좋다.
세상은 팍팍하고 잔인하지만, 사랑 이야기는 그래서 더욱 필요한 것이니 말이다.
셰익스피어의 이야기를 읽노라니, 오드리 헵번이 떠올라 몇 구절 찾아 본다.

고칠 곳...
296. 라쇼몽...
"일본 영화야. 동일한 사건을 네 개의 다른 시간으로 보여주는 형식이지..." '시각'이다. 관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