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 왕의 고뇌
에밀 아자르 지음, 김남주 옮김 / 마음산책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로맹가리가 '가면의 생'이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해놓고, 2년 뒤 다시 그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한다.

아마 그가 <늙음과 죽음>을 앞둔 자신이 더이상 할 말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2년을 살면서, 2년 전의 자기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다시 쓴 <고뇌>가 이 책이다.

 

우리는 노인의 삶에는 지루한 일상만이 가득할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도 그랬을 거다.

근데, 자신이 살아본 노인의 삶 역시, 그닥 지루하지만은 않고 오히려 거기서 더 역동적인 삶을 발견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시 <고뇌>를 쓸수밖에 없었다.

지혜로운자의 대표격인 '솔로몬 왕의 고뇌'를...

 

솔로몬 왕은 기성복의 왕이다.

그리고 그는 생각해 왔다. 인생은 모두 기성복과 같은 것이라고...

누구나 한때 사랑에 빠지지만, 또 쉽게 고난에 처하게 되고, 노년이 되면 무기력하게 죽음을 맞게 될 거라고...

그러나, 정작 자신이 맞은 85세의 노년은,

삶에 대한 회피와 포기 대신, 불멸에 대한 욕망과 사랑에 대한 희구로 가득했던 것이다.

새로운 발견, 그것을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젊은이의 눈에는 열정이 있지만,

노인의 눈에는 빛이 있는 법.

 

빅토르 위고의 말을 인용하여 젊은이의 열정과 패기와 노인의 지혜와 빛을 역설한다.

그러나, 그 지혜의 빛 역시 사랑하는 아내 진 세버그의 죽음에 시들고 마는데...

 

이 소설의 절정에서 두 노년의 결합에 부치는 찬사!

 

건투를 빕니다. 솔로몬 선생님.

부디 원하는 삶을 사세요.

내일을 기다리지 마세요. 바로 오늘 인생의 장미를 꺾으시라구요!(398)

 

기성복의 왕, 그리고 인류를 향한 보편적 사랑을 논하던 '지혜의 왕'

그에게 필요한 것은 역시 <실존의 오늘>이었다.

 

이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주인공 '장'의 취미인 사전 찾기.

사전의 동음 이의어로 즐기는 언어 유희는 도무지 번역이 되지 않는 것들이다.

그 재미를 느끼려면 불어를 제대로 배우는 수밖에 없을 것.

이 책의 구석구석에서는 인생에 대한 유익한 아포리즘들이 가득한데...

 

죽어야 할 운명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불행한 사람들이 행복한 이들보다 행복하다.

자신의 불행에만 신경을 쓰면 되니까.(352)

 

잃을 것이 많은 사람이 더 집착이 큰 법이다. 사랑에 있어서도 그렇다.

잃을까 걱정되어 안달하게 된다. 가지지 못하는 것에도 마찬가지 속 끓인다.

그래서 죽음을 앞둔 그대라면 가진 자일수록 어쩔줄 몰라할 것임은... 그렇겠다.

 

젊은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하기야, 그들 역시 '죽어야 할 운명'임엔 변함 없으니...

 

"우린 모두 뭘 두려워하는 걸까?"

"지속되지 못하는 거."(297)

 

행복한 사람, 서로를 가진 사람에게 '갑자기' 사라지는 일만큼 고통스런 일은 없다.

젊은 사람들일수록 지속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클 수밖에 없는 것.

 

"사람이 행복해지면 삶이 중요해 져요. 그러면 죽음을 더더욱 두려워하게 되고요."(270)

"행복을 느낄 때, 사람은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 겁을 내.

그런 상태를 행복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말이야."(239)

 

사랑은 행복을 부른다. 그리고 사랑하는 삶은 중요하게 여겨진다.

그럴수록 상실에 대한 불안감은 늘어나는 법.

하긴, 불안하지 않다면 행복감도 줄어드는 법.

 

장은 사랑의 개념이 혼란스러워지자 다시 사전을 찾아 본다.

특이한 점은 '사랑'을 의학사전에서 찾지만, 거긴 그런 게 없다.

 

"사랑, 자신보다 상대방의 안녕을 원하고, 그에게 헌신하고자 하는 경향으로...

아, 당신도 이런 감정이 정상이 아니라는 걸 잘 알겠군요?"(188)

 

이렇게 사랑이 정상이 아닌 감정이라고 말하던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아이러니는 오히려 정상이다. ^^

그만큼 이 소설 전체가 풍자와 아이러니, 모순과 소통으로 가득하다.

소통이 되든, 불통이 되든... 사랑의 감정은 많은 것을 남긴다.

그래서 누군가는 사랑한 것을 후회하고, 누군가는 그럼에도 사랑하고 싶어한다.

아파도 아픈 줄 모르고... 가시에 찔린 심장을 안고 가는 것도 사랑인 거니까...

 

"누군가를 사랑했다면, 늘 뭔가가 남아있게 마련이니까요."(275)

 

삶과 죽음, 사랑과 갈등에 대한 것은 말로 명확하게 표현하기 어려운 것들이어서 더 그렇다.

이렇게 말하는 장치로 자신의 생각을 대변한다.

 

"우리가 마음에 대해서 침묵하면 할수록 정말 해야할 말을 하는 셈이 됩니다.

이 세상엔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빛나는 것들이 있지요."(138)

 

삶이 그렇고 사랑이 그렇다.

인생은 온통 숨어있는 의미투성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은 그래서 침묵 속에 묵혀 두는 것이 진실에 가까워지는 방법이리라.

 

"사람의 마음은 몸이 늙는 걸 따라가지 못하네. 몸이 늙지. 마음이 늙는 게 아니야."(118)

 

노인이 되는 고통이 이런 것일까?

몸이 앞서가는 것을 바라봐야 하는 안타까움...

 

로맹가리/에밀아자르는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삶과 사랑의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남길 형식에 대한 스토리를...

그러나,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는 일은 한없이 어렵다. 두렵다. 그래서 이런 말로 작가의 변을 갈음한다.

 

내가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는 건 그럼으로써 나 자신을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다.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일이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 고뇌가 시작되기 때문이다.(68)

 

진 세버그와의 숨가쁜 사랑을 두고 속끓이던 이야기,

자신의 고뇌를 객관적으로 두고 이야기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 이야기를 타인을 가장해서 소설로 쓰겠다는 이야기인 듯 싶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삶이 망각  속에 잊혀지고 사라져가는 일을 두려워했다.

그렇지만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은 더욱 치열함을 전제로 하는 일이어서 쉽지 않았을 거다.

 

솔로몬 씨가 망각을, 망각속에 매몰된 이들을, 이 세상에 태어나 사랑하고 살다가 아무 흔적없이 죽어간 이들을,

과거에 누군가로 살다가 이제는 무와 먼지가 되어버린 존재들을 견딜 수 없어했다는 사실을...

그는 최고의 애정과 극도의 분노를 품고 망각에 맞서 저항했다.(33)

 

그렇소, 모두 유명한 사람들을 추억한다오.

이름없는 사람들에게 관심있는 사람은 없소.

하지만 그들 역시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고통이라는 기성복을 희망하고 고통스러워했소.

태어나면서부터 고통이라는 기성복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종점에 이를때까지 그 기성복을 겸허히 입고 있었다오.

따라서 '이름 없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그 자체로 거칠고 불쾌하고 참기 힘든 거요.

내 보잘 것 없는 능력으로는 그걸 받아들일 수 없다오.(35)

 

인간의 삶은 그 순간 특별하게 여겨지는 것들이라도,

긴 인류의 역사 속에서 보면 뻔하기 그지없는 사건들의 연속이다.

기성복처럼 말이다. 그것을 겸허히 받아들이든, 그 일을 불쾌하게 여기든,

지혜로운 자라면, 그것에 대하여 말하고 싶어할 것이다.

 

그것을 말하는 일은 쉽지 않다.

고통스러운 일을 반추해 내야 하고,

그 일 자체가 특별하지 않은 기성복과 같은 것임을 인정하는 것은 또 다른 고뇌에 빠지는 길이다.

 

결국 솔로몬 왕의 고뇌는 '인류의 삶의 보편성'과 '자기 앞의 생'의 특수성 사이의 고뇌다.

망각과 기억 사이의 고뇌이며,

무명과 유명 사이의 고뇌이고,

불멸과 영원 사이의 고뇌일,

바로 <가면의 생>의 모순덩어리 얼굴을 벗겨보고자 '지혜의 왕'의 고뇌를 우리 앞에 들이미는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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