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렌 그리모의 특별 수업
엘렌 그리모 지음, 김남주 옮김 / 현실문화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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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은 한 편의 우화다.

부제가 '피아니스트 엘렌 그리모가 여행길에서 띄우는 삶의 피아니시모'인데,

피아니시모는 '아주 여리게'라는 뜻이다.

그미의 연주를 보면, 힘이 넘치다 못해 피아노를 두드리듯 연주하는 기교파이며,

청중을 무지 의식하는 <관객파> 연주자임을 생각해 보면, 그의 '피아니시모'는 스스로 반성의 의미를 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관객 없이 연주의 구조적인 단단함과 예리한 리듬감을 추구하는 '글렌 굴드'를  <우상>으로 섬긴다는 그녀는

<관객파>와 <순수 연주파>의 ,

그러니까 호로비츠와 리흐테르의 양편을 모두 욕심내는 욕심쟁이일 테다.

 

근데 이 욕심쟁이는 피아노 연주에만 몰두하지 않고, 이렇게 글을 쓴다.

근데, 이 글이 단순한 '기행문'에 머무르지 않는다.

꿈을 열고 닫으며 드나드는 품이, 장자깨나 읽은 품이다.

 

<나는 심한 허기를 느끼면서 잠에서 깼다>로 시작하는 소설은, <잠에서 깨니 정오였다>로 마친다.

코엘료의 우화 소설처럼 읽어 달라는 주문으로 보고 넘어가겠다.

 

장자의 나비의 꿈을 염두에 두고 쓴 이야기 구조가 아닐는지... 뭐, 아님 말고~ ㅋ~

훌륭한 사람은 유쾌해야 한다. 그가 훌륭한 사람이라면 농담도 이해할 거다. ㅎㅎㅎ

 

 

피아노 앞에 앉아 내가 원하는 소리, 공격적일 정도로 절실하지만

명징한 동시에 어둡게 남아 있는 그런 긴박하고도 직접적인 소리를 끌어내야 했다.

소리?

당연히 명료해야 하지만 물리적인 공격으로 느껴질 정도로 사람을 휘감지는 말아야 하는 것이다.(16)

 

이것이 그의 '허기'의 본질이다.

자, 그는 욕심쟁이이므로, 늘 허기에 시달렸을 터이다.

절대음에의 도달이 아니라, 호로비츠와 리흐테르 사이를 욕심낸다면, 이런 허기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필연에 부딪칠 거다.

그가 원하는 소리는

<관객이 충격을 받을 정도로 공격적이며 절실한 소리>여야 하지만,

<관객과는 상관없는 명징한 소리> 그리고 동시에 그저 명징하게 순수하기만 한 게 아니라 깊이가 있는 음감,

즉 <어둡게 남아있는 긴박하고 직접적인 소리>를 얻고자 하는 왕 욕심쟁이임을 방증한다.

그러므로 리흐테르 편에서 <명료>가 필수요건이지만,

지나치게 <명료>에 강박적으로 응대하노라면, 호로비츠 편에선 <강박적 물리적 공격>으로 느낄지도 모르겠단 거다.

우~~~ 이 아가씨, 무지 대왕 욕심쟁이다. ㅋ~

 

욕심쟁이가 잠에서 깨며 <허기>에서 시작했으니,

그 소설이 <고갈>에서 시작하는 건 당연지사... 근데, 사전을 뒤적거려, 고갈의 상대 개념을 처방으로 삼는 것도 유쾌하다. ㅋ

반의어 : 충만, 부유, 풍요, 호화, 번영, 개화...를 뒤적거려 <떠나리라, 걸으리라, 숨쉬리라>는 꿈을 꾼다.

 

피아니시모를 찾아 떠나는 여행.

열렬한 <명징>과 <공격>의 틈바구니에서

<포르테 f (강하게)>정도가 아니라

<포르티시시시모 ffff>(아주아주아주 강하게)적인 삶을 살아온 그녀로서는

<숨쉬리라>의 빈칸, 또는 '숨표'를 강하게 요구했을지도 모른다.

 

그처럼 사노라면 조급증과 안달함이 심리의 기본 바탕이 되기 쉽다.

그것을 기다림의 미학이 가득한, 피아니시모의 레가토(부드럽게 연결하듯 건반을 바꿔 누름)로 변화시키려면, 여행이 답인 건 옳다.

 

어린 시절 유럽의 단조롭던 음악 체험에서 떠난 그는 미국의 음악에서 '푸가'를 경험했단다.

처음엔 여러 선율이 동시에 웅장 장엄하게 울려퍼지는 푸가 양식에서 감동을 받던 그도 그 생활에 질려 유럽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적은 것이 이 책이다.

 

그녀가 처음 만난 나이든 교사는 <스승의 가치>를 역설한다.

아마 <초심>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는 것일 게다.

"인간이란 각자의 운명에 의해 읊조려진 음악일 뿐"이란 스승의 말에서,

엘렌의 운명은 피아니스트란 운명을 타고나 거기서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는 소박한 깨달음을 전해주는 듯 하다.

 

허기진 그녀에게 교사는 말한다.

 

인간은 배움의 과정 가운데 열심히 헌신하기만 한다면,

인간의 최상의 것을 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현재 있는 것을 무시하지 않는 겸손,

아직 오지 않은 것에 대한 소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오만을 가져야 하죠.(44)

 

<처음처럼>이라도 한잔 마시면서 나눌 이야기 아닐까? ㅋ~

좀 지나치게 우연을 강조하여 우화가 시시해지려고 하지만, 대단한 사람의 이야기임을 염두에 두고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삶의 힘이란,

상대를 향한 생의 약동,

상대의 자유를 완벽하게 존중하면서 아무런 강요 없이 상대를 사랑하고 경탄하는 능력입니다.

삶의 힘, 곧 권력이 아닌 그 힘에 집중할 때

우리는 새처럼, 물고기처럼 자유로워집니다.(49)

 

힘 power과 권력 force 정도를 가르려는 것일까?

사랑하는 이가 힘을 얻을 수 있다. 권력에 집중하면, 자유로워지지 못한다.

그 힘은 억지로 얻으려해도 안된다.

'겸손'과 '오만'의 미묘한 밀고 당기기의 적절한 배려의 어디쯤에 묘미가 있다.

 

노 교사와의 대화를 마치고,

소나타의 마지막 음이 끝났을 때처럼,

침묵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이 풍미있는 이야기에 대한 진정한 찬사였고,

우리는 미소를 지었고 바깥 풍경을 응시했다... 고 감상을 이야기한다.

 

수녀원의 일꾼 베아트리스에게서 얻는 교훈은 '자연스러움'이다.

 

자연속에서 제가 들을 수 있는 어떤 방대한 음악,

존재 전체를 뒤흔들고 그 울적함에서 놓여날 수 없는 음악을 찾게 되지 않을까요?

제게 음악이, 내밀하고 본질적인 음악이 될 수 있는

어떤 소리, 어떤 외침, 어떤 한탄, 어떤 소음...을 말이죠.(87)

 

작가가 직업적 작가라 해도 이런 정도 교훈을 나무라긴 힘들 터인데,

그미는 전문 피아니스트 아닌가. 뛰어나다고 찬탄할 밖에...

 

그녀에게 '그저 존재한다는 것이야말로 둘도 없는 행복함' 가르쳐 주려고 심부름도 시킨다.

결국 그녀는 <나 자신이 된다는 것은 내 영혼의 가치에 어울리는 존재가 된다는 것>임을 깨닫는다. (246)

 

상당히 동양적 사고를 하는 엘렌은 베아트리스의 힘을 빌려 관계의 인드라망을 이야기하려 한다.

 

하나의 아이리스는 보이지 않는 땅 속의 핏줄로 때로는 수백 미터 떨어져 있는 또 다른 아이리스와 연결되어 있답니다.

또한 많은 야생초들 간에는 수액과 힘과 생기를 순환시키는 무수한 도관과 뿌리줄기의 그물망이 있는 셈이죠.(103)

 

옳다. 존재는 홀로가 아니다.

음악은 명징함을 추구하여야 하지만, 독고다이로, 글렌 굴드처럼만 살 순 없는 법.

 

늑대에 대한 부분은 <대인관계, 또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와 연관된다.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서로 이해하는 방식이 다른 인간, 또는 늑대와 말이다.

 

내가 그를 사랑하므로 그도 나를 사랑한다는 대전제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기분은 좋지만 실상과 달랐다.

그것은 너무나도 단순하고 자기 중심적인 생각이었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든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든

시작되었다고 해서 상호적인 강렬한 친밀감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 관계는 줄곧 가꾸어 나가야 한다.

관계의 설정만으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고 내어줄 것도 없다.

귀한 관계일수록 - 늑대와의 관계는 얼마나 경이롭고 귀하며 특별한가 - 깨어지기 쉽고 통제하기 어려운 법(135)

 

그렇다. 사랑은 시작이 반이 아니다.

언제나 귀한 관계일수록, 손님처럼 온 마음을 다해 대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할 일이다.

 

요가는 동작과 동작 사이가 떨어진 듯 이어져야 한다.

피아노 용어로 '레가토' 기법이다.

삶 역시 그런 것 아닐까?

삶도 분절된 사건들을 하나하나 밟아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런 저런 삶의 이야기들이 떨어진 듯 이어져 나가는 것이다.

엘렌은 그런 삶의 흐름을 피아노의 '레가토'와 연관지어 파악하고 있다.

그래서 '포르테시시시모'에 가까운 삶으로 점철된 과거를 돌아보며, 피아니시모를 추구하는지도 모른다.

 

뮤직 박스 이야기에서 동양적 사고가 짙게 풍긴다.

 

"당신이 가진 뮤직 박스는 수집가에게 무척 흥미로운 물건입니다. 제가 사고 싶은데요."

"저로서는 이걸 판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사실 이 물건은 제 것이 아닙니다. 잠시 빌린 것, 아니 맡아두고 있을 뿐이죠."

"잘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삶이 그렇듯이 말이군요."

 

삶은 우주에서 잠시 기운을 빌린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치 삶이 영원한 자기 소유인 양 여기고 산다. 겸허해질 노릇이다.

포르테시시시모에서 피아니시모로... 허기를 숨기며 겸손하게...

 

인생은 제각기 나름의 향기를 가진 것들이다.

그 향기를 제대로 파악하고 풍길 줄 알면 남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구름에는 미묘하고 수줍은 빛깔에다 먼 남쪽 하늘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더하고, 거기에 바람의 서명을 남겨두었다.

바람마다 특유의 문장을, 자신의 테시투라(음역)를, 자신의 지형을 갖고 있다는 것.

독특한 형태로 하늘을 장악한다는 것을 아는가?

늑대들과 함께 길게 누워있는 나를 커다란 그림자로 어루만져 주는 구름을 나는 사랑한다.(215)

 

자연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미묘한 흐름을 읽는 일...

거기 따라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일... 그것 역시 동양적 사고에 가깝다.

그녀가 마지막 찾아간 목적지에서 역시 큰 얻음을 깨닫는다.

 

오늘날 우리는 음악을 사탄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오늘날 음 하나하나, 휴지부 하나하나에 자신의 삶 전체를 투사하지 않고

열정 없이 기계적으로 연주하는 건 비단 음악만을 배신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 전체를 배신하고 영혼을 배신하고 나아가 신을 배신하는 것.

인간은 자신이 훼손한 아름다움, 조롱했던 사랑에 헌신해야 한다.(225)

 

예술이 음악이 찾아야할 것.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아야할 지점을 생각한다.

삶의 한 순간 한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가지 못하면, 삶의 나침반을 잃어버린 것과 마찬가지듯,

음 하나하나, 쉼표 하나하나도 열정으로 짚어야 하는 자세를 생각한다.

 

결국 작가 엘렌은 길은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길은 아는 사람에게 묻지 마라.

길은 너처럼 길을 찾는 사람에게 물어야 한다.

갑자기 장애물이 나타나 발이 걸릴 수도 있다. 슬픔이라는 장애물에 비틀거릴 수도...(234)

 

길은 거기 있는 것이 아님을 발견하는 것이다.

누구도 가르쳐줄 수 없는 것이다.

장애물이 나타나 비틀거릴 수도 있으나,

길은 찾고 물으며 나아가는 것일 뿐. 완성태의 '존재'가 아닌 것이다.

길은 영원히 '-되기'의 형태로 나타나는 '리좀 Rhizome'의 일종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베아트리스를 빌려 '뿌리줄기'란 표현을 집어넣은 모양이다.

 

늑대 토템의 후예,

영원한 유목민의 자유를 추구하는 엘렌.

그에게 '노마디즘'은 자연스런 철학적 만남이었을 것이고,

그에게 세상은 '천 개의 고원'이더라도, 그 고원은 낯설고 힘들게하는 곳이라기보다,

찾아가 보고 싶고, 거기서 새로운 삶을 만나고 누려 보고 싶어하게 만드는, 일종의 유혹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이 세상과 하나로 연결되어있는 한뿌리임을 찾는다.

 

세상이라는 웅장한 교향곡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킨다면 그런 심오한 관점이,

청중이 없는 그런 연주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서로 나누지 않는다면 사랑, 예술, 음악, 자연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성인이 광야에 있다면 그게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아무도 읽지 않는다면 완벽한 책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리하여 그는 다시 세상 속으로 돌아온다.

꿈을 깨는 것만으로도 그는 바로 복귀가 가능하다.

삶은 한바탕 꿈에 불과한 것일 뿐.

 

피아노 앞에 앉아 내가 원하는 소리, 공격적일 정도로 절실하지만

명징한 동시에 어둡게 남아 있는 그런 긴박하고도 직접적인 소리를 끌어내야 했다.

소리?

당연히 명료해야 하지만 물리적인 공격으로 느껴질 정도로 사람을 휘감지는 말아야 하는 것이다.

 

수미상관.

그가 원하는 소리는 '명징'해야 하지만,

'물리적 공격'으로 느껴질 정도로 사람을 압도해서는 안된다는 깨달음을,

그는 '교향곡' 속의 자신, '청중이 필요한 연주'로 회귀한다.

 

결국 '궁한즉 변하고 변한즉 통한다. 통하면 아프지 않는다. 통하는 것은 오래 간다'는 주역의 도돌이표를 읽는 듯 마무리한다.

 

예술과, 문학과, 삶과 꿈을 비볐는데도,

각각의 맛이 산뜻하게 살아있는 책을 찾는다면, 이 책도 아주 괜찮은 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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