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벗과의 대화
안대회 지음 / 민음사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젊은 시절엔 '인생론'이 대단한 건줄 알았다.

이제 나도 반푼은 꺾인 인생이 되고 보니, '인생론'은 몇 가지로 정리된다.

"재밌게 살자."와 "잘 살자." 그리고 "현실적으로 살자." 정도...

그중에 내가 젤 좋아하는 건, 1번이다.

이건 뭐, 내가 찍기 세대라서 찍는 덴 자신있기 때문이기도 한데,

살아 보니깐, 머릿속에 복잡한 생각들 넣어놓고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생각들이 아무리 좋아도, 내 몸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면,

즉, 재밌지 않은 것이라면, 난 할 수 없는 인간이란 걸 나이 오십을 앞두고야 알게 되었다는 거다.

 

아들하고 나하고 참 다르고 달라서, 첨엔 아들을 미워했다.

왜 저자식은 날 안 닮았을까? 생긴 건 쏙 빼닮았는데, 공부는 전혀 안 닮아서 실망이다~

이래서 시작한 게 체질 공부다.

체질 공부를 하면서 아들을 이해하게 되었고, 사람은 다를 수 있음을 이해하고 나니, 아들이 사랑스러워졌다.

그래서 삐걱거리면서 아들과 같은 학교에서 3년을 한솥밥 먹고 살 수 있었다.

 

물론, '잘 살자'는 '건강한 웰빙'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올바른 삶도 포함되어 있지만,

우리 세대는 여기 너무 속박되었던 삶을 산 거 같다.

'현실적'에 대해서는 난 잘 모르겠다.

재밌게 사는 게 왜 승진하는 거보다 가치가 적다고들 여기는지 말이다.

승진을 위해 현재의 고통을 감수하는 일은... 난 딱, 질색이다.

 

안대회라는 한학자는 늘상 옛사람들과 노는 사람이다. ㅋ~

요즘 정민 선생이 '다산 茶山' 선생을 사숙하더니 '다산 多産'증에 걸리셨다. ㅎㅎ

읽는다고 부지런히 읽어도 도무지 그 자식들을 모두 일별해 드릴 수가 없다. ㅠㅜ

집에 쌓아둔 책들이 '황상과 나눈 편지(삶을 바꾼 만남)', '차이야기(새로 쓰는 조선의 차문화)', '한국학(한국학 그림과 만나다)' 등 수북하다.

안대회는 정민에 비하면 '과작 寡作'이다.

그렇지만, 글로 치면 정민 선생보다 조금 더 깔끔한 맛이 더하달까?

작품이란 게 '양적 팽창이 질적 도약'을 보증하기도 하지만,

차분한 속에서 '깊이와 넓이, 그리고 세련미'까지를 얻어내는 것이 안대회의 '멋'이라 본다.

 

이 책은 '소품'이다.

집을 꾸밀 때, 커튼이나 소파 등의 빛깔과 톤은 집안 전체의 분위기를 좌우하지만,

막상 그 집을 꾸민 사람의 성정을 알아보게 하는 것은, 적절한 곳에 놓인 자그만 화분 하나, 장난감 하나일 수 있다.

거창한 작업에 몰두하는 정민 선생에 의하여 '다산'이란 거두를 우러르게 하는 작업도 의미있지만,

이런 '소품'들이 아기자기하게 놓인 정원이라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유유자적 배회할 수 있겠다.

그만큼 이 책 속의 글들은 아기자기하다.

 

주제는 무지 방만하다.

그런데 그 다양성이 오히려 아름답다.

다양성이 생물 종의 보존에 긍정적으로 기여한다는 말처럼,

조선의 글들이 남긴 획일적 사상 (강상의 윤리)에 비하면,

그런 윤리, 도덕에 얽매이지 않는 탐구와 사유의 펼침이 참으로 다채로워 황홀하다.

그 빛깔이 어느 하나에 머무르지 않고 퍼지고 번지면서 어울린 모습이 마음을 아른아른하게 만든다.

 

홍길주의 <숙수념 : 누가 내 꿈을 이루어 줄까?>이란 작품처럼 '판타지'를 끄집어 내기도 한다.

희망과 절망의 판타지이면서 상상력과 교양의 저작인데 이런 이야기가 있다는 것 자체가 신선했다.

 

박지원의 벗에 대한 편지도 아름답다.

두 사람이 친구가 된 것은 참으로 보통의 인연이 아니고 보통의 만남이 아니다.

수천 년 흘러온 세월 속에서 하필 그 사람을 벗으로 만나 사귀다니.

이덕무 역시 <느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다>면서 반색을 한다.

 

법구경에서, <건강보다 더 큰 은혜는 없으며, 만족할 줄 아는 마음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다>는 구절도 들려준다.

종횡무진, 온고이지신은 특정 방향이 없다.

 

이학규란 시인의 <비해>에서는 번민과 근심의 순간에 더 비극적인 순간을 떠올리면서 심리적 위안을 얻는 글도 재밌다.

번민이 찾아들 때에는 순장을 당하는 사람을 떠올리고,

근심스러울 때에는 임종을 앞둔 사람을 떠올려 본다...

 

송나라의 시인 육유에게서 빌려온 '서소'란 말은 참 정겹다. 책방도 아닌, 책 둥지라니... ㅎㅎ

 

내 방 안에는 책이 궤짝에도 들어있고, 앞에도 흩어져 있고, 침상에도 널려 있네.

상하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책 아닌 게 없지.

어쩌다 나가볼까 염을 내면 어지럽게 널려 있는 책들이 쌓아놓은 마른 장작처럼 포위해서 나가지 못할 때도 있네.

그런 때면 문득 혼자 웃고는 '이야말로 내가 말한 둥지가 아닐까!'라고 자문자답한다네.

 

책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이야기를 웃고 넘길 수만은 없을 일이다.

이사라도 해보면, 일꾼들이 투덜대는 소리에 맘 약해져 한 오만 원이라도 얹어줘야 했던 기억도 날 거고 말이다. ㅋ~

 

추사의 노규황량사... 글씨는 참 예술이다.

노규(이슬 맺힌 아욱)와 황량(누런 기장밥)을 먹는 사람들의 모임.

얼마나 단출하면서도 정감으로 가득한 시회였을지를 상상하는 일만으로도 마음이 시원해진다.

 

성호 이익의 '삼두회'도 재밌다.

가까운 친척들을 불러 콩죽, 두부, 된장 등을 나눠먹으며 담소를 나눴다는 이야기.

감옥 가는 일을 '콩밥 먹으러 간다'고 할 정도로 현대까지도 콩은 거칠거나 검소한 음식의 대명사였다.

양반이 지켜야할 검약에 대하여 생각할 일이다.

그뿐 아니라,

그 자리에 젊은이와 어른이 모두 모이자 해박한 지식과 굉장한 언변으로 옛일을 말씀하셨다.

자세히 헤아리고 분변하시니 말슴마다 법도에 맞아 구경하고 감화된 자가 많았다.

이런 회합이라면, 콩밥을 거칠다고 투덜댈 일이 아니다.

널리 알려야 할 모임의 양태다.

 

이규보가 몸을 기대는 안궤의 부러진 다리를 고치고서 새긴 '기물명(記物銘)'도 이채로운데,

피곤한 나를 부축한 것은 너고,

다리 부러진 너를 고쳐준 것은 나다.

병든 이들끼리 서로 도와준 것이니 누가 공이 있다 뽐내랴?

의유당 김씨의 '조침문' 에 버금가라면 서러워할 감상 아닐까?

재밌다. 삶은 이런 자세로 살면, 힘들지 않잖을까?

옛글에서 이런 마음을 배우는 거... 그런 게 '온고이지신'아닐까?

 

소문으로 듣기만 했던 '마쿠라노 소시(枕草子)'의 세이쇼나곤이란 상궁을 만났다.

1000년 전 일본 여자의 삶과는 아무런 교섭도 없는 내게 이 수필집이 곰살맞게 다가오는 것은 정말 이상하다.

담백하고도 예민한 감각, 여성적 시선과 언어가 발산하는 멋이 매력적이고,

인생에 대한 통찰이 생동하여 이틀 만에 다 읽기는 했으나 너무 빨리 읽은 것 같아 종내 아쉽다.

 

방 한쪽 구석이나 장지문 뒤에서 들을 때, 식사 중인지 젓가락 소리와 숟가락 소리가 섞여서 들리는 것.

그런 때 주전자 손잡이가 탁 하고 옆으로 넘어가는 소리 또한 마음이 끌린다.

안 선생이 아쉬워할 만 하다.

이런 책이라면 나도 만나보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넘친다.

 

스승 이용휴가 제자 이언진의 죽음을 두고 남긴 애도시...

평범한 작은 남자에 불과하지만, 죽고 나자 사람 수 줄어든 느낌일세.

세도에 무관한 사람들은 빗방울처럼 많기도 하건만.

박희병 선생이 중점 연구한 호동(골목길) 이언진이어서, 그 아픔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제자였지만, 지음의 죽음에 버금가는 아픔 아니었을지... 상상이 된다.

 

살구나무 꽃을 본 사람들은,

왜 고전의 클리셰에서 '도화 행화, 복숭아꽃 살구꽃'이 등장하는지 알 것이다.

내 본적인 고향 역시 '목행동'이란 살구꽃이 들어선지, 복숭아꽃보다 살구꽃이 더 정겹다.

 

 

 

이 책에서 재밌는 사실을 두 가지 찾게 되는데,

 

우선,

우리가 잘못아는데 널리 알려진,

<야설 野雪>을 서산대사의 글이란 김구 선생의 이야기를 바로잡는 부분이 있다.

 

눈발을 뚫고 들판 길을 걸어가노니

어지럽게 함부로 걷지를 말자.

오늘 내가 밟고 간 이 발자국이

뒷사람이 밟고 갈 길이 될 테니.

 

순조 연간의 시인 이양현의 작품이라고 바로잡는다.

어쨌든, 눈길의 벌판을 떠올리면서 아스라한 마음을 떠올리게 하는 명문임엔 변함이 없다.

 

또 하나,

연암 박지원이 '벗은 제2의 나'라고 했는데,

박지원은 이수광으로부터, 이수광은 마테오리치로부터,

키케로의 유명한 로마의 속담을 전해 들은 것을 이수광의 '지봉유설'을 통해 확인하게 되는 그런 이야기...

 

 

옛글 속에는 옛사람들이 들어 있다.

허나, 그들은 고리타분하고 고색창연한 사고에 얽매인 '옛사람'만인 것은 아니다.

그들의 글을 통해 그들 역시 자신의 삶을 토대로 '상상과 발견'의 묘미를 느끼며 살아갔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안대회처럼 그들의 삶을 읽어주는 이를 통하여,

삶을 '즐길 줄 아는 재미'를 느끼게 되는 일이야말로 독서의 묘미가 아닐까?

 

 

독서를 통해 새로운 인생관을 확립한단 건 억지일 수 있으나,

"재밌다~"는 삶을 살려는 이에게도,

"현실적" 또는 "잘 살기"를 추구하는 이에게도,

역시 독서는 한 의미를 제공할 수 있는 일이니,

천년 전 벗과의 대화를 통해,

'인생관'을 배우기도 하고, 삶의 의미를 음미할 수 있는 독서...

한 여름 무더위를 식혀주는 시원한 한 줄기 소나기일 수도 있는 일이다.

 

이 책은 그런 한 줄기 소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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