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디 수녀의 나를 사로잡은 그림들
웬디 베케트 지음, 김현우 옮김 / 예담 / 2001년 6월
평점 :
절판


웬디 베케트 수녀님의 글은 참 편안하다. 그런데 이해인 수녀님의 글처럼 마냥 편안하지만은 않고 때로 격정적이고, 때로 매혹적이다.

이 책은 영국에 있는 여섯 개의 미술관을 순례하고 수녀님의 마음에 드는 작품들을 간략하게 설명한 글이다.

루브르는 프랑스 박물관인가? 하는 책도 있지만, 루브르는 프랑스 박물관이 아니다. 대영박물관과 더불어 루브르 박물관은 식민지 역사 박물관이라 할 만하다. 이 책에도 유럽 여러 나라의 작가들이 등장하지만, 약탈의 냄새가 없어 좋다. 그리고 그 미술관들의 외관을 잔디밭과 함께 찍어 놓은 사진들을 보노라면, 마치 내가 그 한적한 잔디밭에 드러누워 대서양의 섬나라 햇살을 따스하게 받고 있는 느낌이다. 물론 그 섬나라의 일년 중 절반은 을씨년스런 겨울이지만, 이 책에 수록된 그림들은 정말 따사로워 보였다.

수녀님을 사로잡은 많은 그림들 중, 나를 사로잡은 그림을 몇 점만 기억에 남기자.

주세페 데 리베라의 '데모크리토스'라는 작품을 보는 순간, 아, 이 작가가 추구하는 정신 세계는 이런 것이구나'하는 예술의 진실성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이 화가가 모델로 삼은 사람은 며칠을 이 자세로 버티고 있어야 했겠지만, 부스스한 머리칼에 터프해보이는 표정, 소매가 해어지긴 했지만, 책을 뒤적이고 있는 지적인 손매와 가장 편안해 보이는 자세의 구도는 '조르바'가 현존한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하는 정도의 그림이었다. 문학에서만 진실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에서도 진실성을 느낀 작품이랄까?

얀 리벤스의 '예술가의 어머니'도 맘에 든다. 수녀님이 적은 대로, 아무 설명 없이도, 작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연륜과 노인의 독서, 그 찡그린 콧날에서 우러나는 삶에 대한 외경이 사무치게 와닿은 그림이다.

숱한 남자 화가 중 홍일점으로 '골로빈 백작부인'을 그린 엘리자베트 비제-르브룅의 작품도 명쾌한 붉은 색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그림, 아는 만큼 보이고, 그때 보는 그림은 전과 같지 않게 해 준 수녀님의 설명이 돋보인 그림도 몇 편 기억에 남는데,

구에르치노의 '감옥에 갇힌 성 요한을 방문한 살로메'의 설명은 한 편의 그림이 갖춘 철학적 깊이를 느끼게 했다. 갇힌 자의 밝고 편안한 공간과 자유로운 자가 얽매인 창살의 대비는 삶의 의미를 깊이 깨우치는 글이다. 수녀님의 글이 좋은 이유는 삶의 깊이를 아는 분이기 때문이다. 늘 밝은 쪽만 바라보는 수녀님의 글은 삶에서 동떨어지기 쉬운데, 웬디 수녀님의 글을 읽다보면, 공감가는 부분이 참 많은 편이다.

티치아노 베첼리의 '타르귀니우스와 루크레티아'도 설명을 들으면서 보면 작품을 일별했을 때 보지 못했던 것들을 캐치할 수 있다. 이 점 역시 '큐레이터'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리고, 수녀님의 설명 없이도, 감동적인 작품,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바람'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순간을 잡아낸 그림이다. 역시 르누아르라는 생각이 든다. 르누아르의 시력은 평범한 사람보다 빛에 반응하는 세포가 몇 배 발달했던 것이 아닐까. 어쩜 보이지 않는 봄의 공기의 흐름까지도 인지하고 그려내는 것일까... 존경의 념이 저절로 우러나는 그림이었다.

웬디 수녀님과 함께한 간단한 여행이었지만, 비록 고등학교 도서실이 부족하더라도 이런 책을 서점에서 사 보지 않고  빌려 볼 수 있는 처지인 것이 더할 나위없이 행복하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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