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 가쁜 사랑
폴 세르주 카콩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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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책이 참 이쁘다.

마음산책은 책을 이쁘게 만들 줄 아는 출판사다.

표지 디자인도 물론이거니와, 노란 양장 표지에 황금색 책갈피끈까지... 세심한 배려가 돋보인다.

 

한 시대를 풍미한 소설가 로맹 가리가 45세에 21세의 신인 여배우와 사랑에 빠진다.

그 사랑은 뜨겁게 지속되지만, 41세 진 세버그의 자살과 66세 대 작가의 자살로 비극적 결말을 맺는다.

그러나... 과연 그들의 삶이 자살로 마감되었다고 해서, 비극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을까?

 

미지근하지도 않게 식어빠진 생을 100년 이상 유지하는 것이,

과연 뜨겁게 열정을 다 쏟아부은 40년, 60년의 생에 비하여 더 가치있는 것일지... 고민하게 만드는 인생 이야기다.

 

아주 고리타분한 결혼관과 보수적 봉건주의에 얽매인 한국인인 내가 읽기엔,

그들의 사랑과 결혼, 그리고 숱한 염문들을 접하는 일이 당황스럽기만 하다.

 

그렇지만, 자신의 삶에 운명적으로 다가온 사랑 앞에서 정직한 감정을 드러내는 그들의 사랑이 부럽기도 하다.

 

이 책은 전기문으로 볼 수 있는데 문체가 참 유려하다.

가리의 부인 레슬리와의 만남에 대한 서술 역시 멋진데,

 

가리는 레슬리에게서 분신같은 나그네의 영혼을 알아보고 춤이라도 추려는 듯 그녀의 손을 잡았다.(68)

 

두 사람은 존재와 사물의 영을 제 것으로 삼아 변화시키려는 욕망을 가졌다는 점에서 닮았다.

그렇게 그들은 마치 스스로 무대에 올라 세상을 좀더 아름답게 바꿔놓으려는 자신들의 욕구에 응하려는 듯 했다.(69)

 

때로는 한쪽의 자아를, 때로는 상대 쪽의 '나'를 성가셔하며 레슬리와 가리는 미숙하거나 유감스런 행동의 한계를 일러주고

인도해주는 특별한 직감을 갖춘 관계를 유지했다.

은밀한 떨림이 적절한 때에 찰칵 하고 당신을 관용으로, 신중함으로, 사랑으로 이끌어주는 관계 말이다.(68)

 

나는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는 모든 사람에 반대한다.

 

알베르 카뮈의 말이다.

1960년대 미국은 흑인 인권 운동, 베트남전 반전 운동, 뉴에이지 운동의 실험실이었다.

진 세버그는 그 와중에 인권 운동에 뛰어들기도 하지만, 오히려 상처를 많이 받게 된다.

 

행복은 때때로 여행의 얼굴을 하지만,

목적지인 경우는 드물다.

 

이렇게 비유적으로 가리와 진의 삶에 드리운 불행의 그림자를 커튼을 치듯 비추어 준다.

가리가 마요르카 섬의 어린 소녀 파브라와 사랑을 나눈 부분은 짧지만 문학적이다. 재밌다.

 

이제 겨우 청소년기를 벗어난 파블라는 젊은 아가씨들이 그렇듯이

새끼 고양이가 스치거나 강아지가 살짝 깨무는 것처럼 넋을 빼앗는 미소를 지녔다.

여자들은 배울 필요가 없다.

그네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어떻게 하면 남자들에게 사랑의 전율을 일으키는지를 안다.

가리는 어린 사내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별수 없었다.

모든 남자는 평생 어느 정도는 어린 사내로 남는다.

청춘의 환상과 장년기의 환상을 채우는 불륜의 욕망을 서로가 상대에게 반사하는 이 거울 놀이에서

두 사람은 각자 얻을 것을 얻고 있었다.

그들은 연기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브역을, 그는 악마 역을.

그것은 '잃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었다.

기다리면서 그는 그를 도발하고, 유혹하고, 우연히 만난 것처럼 꾸미려고 꾀를 부리는 그녀를 보며 좋아했다.

성숙한 여인의 나이가 되자 그녀는 이 마법을 끝내고 청소년기의 내밀한 일기를 덮고 싶어 했다.

가리는 여전히 그의 내면에서 포효하던 악마로부터 해방되었다.

늙어버린 사자가 숨을 돌리기 위해 수풀 뒤로 숨는 것처럼 악마는 이제 슬그머니 사라질 일밖에 남지 않았다.(143)

 

가리와 진, 그 두 사람의 사랑을 비유한 슬픈 문장도 있다.

 

진은 언제나 달아나는 행복의 그림자 뒤를 좇아 달렸다.

가리는 어쩌면 행복을 만났는지 몰라도 붙잡을 줄은 몰랐다.(175)

 

에밀 아자르란 분신을 만들어 프랑스 문단을 농락한 가리.

 

글쓰기란 원래 인간과 그의 그림자 사이의 결판내기이기도 하다.(218)

 

글이 사람을, 삶을 모두 담아낼 수 없다.

그림자가 승하느냐, 인간의 삶이 승하느냐...

판정은 어쩌면 독자의 몫이다.

 

한 여인을 온 눈으로 사랑하고,

자신의 모든 아침과 숲과 밭과 샘과 새들을 다 바쳐 사랑해도

그 여인을 충분히 사랑한 것이 아니며,

세상은 당신에게 남은 모든 것의 시작일 뿐이라는 걸 우리는 안다.(230)

 

아, 알기에 더 서글픈 사랑인지도 모르겠다.

 

권총을 입에 물고 당기는 로맹 가리의 심사를 추측할 수도 없지만,

그 뜨거운 삶에 대하여 읽는 일만으로도 삶의 온도가 조금은 올라갈 수도 있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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