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왼손은 왕, 오른손은 왕의 필경사
한유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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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을 읽고 가르치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아이들에게 '소설은 작가의 생각을 특정한 이야기 구조를 통하여 들려주는 전해주는 이야기'라고 가르친다.

소설은 특정한 이야기의 플롯이 중심이고(그 플롯 안에서 인물들이 특정 배경에서 사건을 저지르는 구성이 짜여진다.) 거기에 작가의 문체와 주제 의식이 드러나는 거라고 말이다.

 

근데, 한유주... 얘, 괴물이다.

이 책을 소설집이라고 이름붙이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 소설이 기존의 소설의 의미를 담고 있다면 말이다.

우선, 이 소설에선 <서사>가 없다.

하다못해, 이상의 소설에서도 서사가 중심이어야 그것이 소설이다.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것도 어느 정도 한도 안에서라야 하는 것 아닐까?

이 책을 <소설을 쓰는 사람의 소설>이라지만, 암만, 소설쓰는 사람이래두... 아닌 건 아닌 거 아닌가?

이 책을 두고 '잘 쓴 소설'이라고 하는 건, '벌거벗은 임금님'더러 화려한 옷에 대한 치사를 늘어놓는 꼴 아닌가 말이다.

내 의견은 그렇다.

 

그럼, 이 책을 왜 읽었냐구?

이뻐서. 책이 참 이뻐서 읽었다.

그리고 제목이 매력적이어서, 그래서 읽었다.

 

근데, 읽고 나니... 뭐, 다 읽지도 못했다.

절반 정도의 작품을 건너뛰며 읽었는데, 머리에 쥐나는 줄 알았다.

 

나의 왼손은 왕, 오른손은 왕의 필경사.

오늘 왕의 입은 고요하고 왕의 필경사는 왕의 명령을 기다린다.

나의 왼손은 왕, 오른손은 왕의 필경사.

오늘 왕은 피곤하고 왕의 필경사는 제 낯에서 피로를 감춘다.

나의 왼손이 드물게 말하므로 나의 오른손은 드물게 받아쓴다.

나의 오른손이 나의 왼손을 베끼는 동안 왕국은,

몰락의 징후를 드러내거나 혹은,

힘겹게 지속된다.

 

시라고 해도 난해한 시에 속할 터인데,

소설에서 이건 언어를 통한 폭력 아닌가?

 

음의 변화와 소리의 변화를 즐기는 음악에서도 헤비메탈의 지경에 가면 도리질을 치게 되는 수도 있듯,

달콤해 보이는 언어 속에서 <몰락의 징후>를 힙겹게 지속하는 <서술만 하는 서술자>를 대하기는 힘겹다.

그 핑계를 읽어보면 이렇다.

 

내가 계속해서 같은 말들을 강박적으로 반복적으로,

되돌아오고 되돌아 가는 말들을 되풀이하는 까닭에 대해,

아무리 공을 들여 당신에게 설명한다고 해도,

나의 언어와 당신의 언어는,

언어라는 단어를 분명 공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어에 대한, 나에게서 당신에게로의 소유권 이전이 쉽지는 않았고,

소유격이라는 문법의 상황이 변하지 않으므로,

나는 더 이상 자력으로 변호할 수가 없다.

언어를 소유하다니, 언어도 사물인가.

나는 문득 쓰기를 멈추고 당신에게 묻는다.(농담 중)

 

이런 생각을 날걸로 드러내는 건...

언어학자들에게 맡길 일이고,

소설 쓰는 사람은 말이다.

이 이야기를 '그' 또는 '그녀' 아니면 '그 아이'에게 투영시켜 서사를 지어내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나?

 

하다못해

왕이 있었다. 그에겐 왕의 명령을 따라 베껴 쓰는 필경사가 있었다.

그런데, 그 필경사의 전치사 한 단어나, 미묘한 수사법에 의하여 재물들이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하는 것이었고,

사람의 목숨도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것이었다.

그 왕과 필경사를 지켜보던 신하가 그 전모를 파헤치려 왕의 명령과 필경사의 문서를 대조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 신하가 기록한 메모가 발견되었는데,

거기엔 왕의 명령과 필경사의 문서 사이의 차이점 못지않은 의견 차이가 들어 있어서,

과연 의사의 전달이란 게 가능하기나 한 건가?

고민하다가 그만 떡을 먹고 떡이 막히고, 숨을 쉬다가 기가 막혀 죽고 말았다~

는 이야기~

라도 들어 있어야... 소설 아니냔 말이다.

 

하지만 기적처럼,

아니, 이런 사소한 일들에 기적이라는 명사를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

신기하게도, 그래, 신기하다는 표현이 옳을지도 모르지.(머리에 총을)

 

언어가 사용되는 현실 자체가 기적에 가깝다.

그것도 바벨탑이 무너진 이후로 서로 다른 종족의 언어를 사용하는 일은 말이다.

그렇지만, 그걸... 바벨탑 이야기...로 써야 소설가 아니냐?

그게 기적이야~ 이러면... 수다쟁이거나, ㅋ

거기다가 '머리에 총을' 들이대도 할 말은 한다는 배포는 인정하지만...

좀 그렇다. ^^

 

단어들을 읽거나 들을 때마다 나는 그것들의 그림자를 본다.

나는 그런 그림자들을 쓰고 싶다.

그러나 그림자들은 씌어지는 순간 다른 단어들이 되어 버린다.

그림자들을 쓰기란 불가능하다.

그것들은 사물이면서도 사물이 아니고, 사고이면서도 사고가 아니다.

그것은 추상적이지도 구체적이지도 않다.

잃어버린 문장을 되찾고 싶지는 않다.

문장은 잃어버렸지만 잃어버림이라는 단어가 남아 있다.

모든 것들은 이미 잃어버렸거나 곧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인력이거나, 척력이거나)

 

이 정도 배포라면, 앞으로 기대되긴 하는데...

이 책은 실패작이다.

소설집으로선 말이다.

 

라캉처럼 말이다.

나는 쓰는 곳에서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쓰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쓰려면... <언어의 감옥> 뭐, 이런 책에서 이야기해야 자연스런 거 아닐까? ㅋ

 

소설을 쓰(려)는 이의 소설이라는 말 자체가 소설스럽지 않고,

문자도 있고 문장도 있으나, 서사적 글쓰기가 부재한 이런 이야기를 소설로 이름붙이긴 어렵다.

마치

인간도 있고 관계도 있으나 서사적 삶의 인간관계가 부재한 현대인의 알레고리처럼,

인간 사회의 몰락의 징후를 보여주려 하는 것이었다손 치더라도...

인간 사회를 베끼고 받아쓰는 존재에 불과한 <필경사>의 목소리가 너무 울려퍼진다.

뭐, 어차피 '왕'은 귀환하지 못할 게 뻔해 보이지만,

그 왕을 '벌거벗기고' 놀려먹을 거까진 없잖을까?

 

나는 단어를 쓰고 싶고,

문장을 쓰고 싶다.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고 소설을 쓰고 싶다. <인력이거나, 척력이거나>

 

근데 왜 그렇게 설명이 많은 걸까? 내 눈엔 소설은 없고, 다 설명으로 보이는데 말이다.

 

모든 달라짐은 영원히 현재형이다.

믿음은 아무 것도 담보하지 않는다.<인력입니까, 척력입니까>

 

날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둘 중 하나인 건 아니다. 세상은 말야.

이제 서른 된 아가씨가, 넘 시크하고 쿨한 거 아냐?

좀 말랑한 가슴으로 세상을 봐주면 안 될까?

소설가의 가슴은(그 가슴 아님 ㅠㅜ) 세상의 눈물도 흠뻑 빨아들일 수 있는 스펀지라도 좋지 않느냐구.

 

그래. 맞어.

모든 달라짐이 영원히 현재형이지.

어떤 믿음도 뭔갈 담보할 수 없어.

인생무상.

그치만 말야.

 

저런 멋진 제목을 지어낼 줄 아는 당신이라면...

인력에 이끌린 두 사람을 꾸며낼 줄 아는 언어의 밭도 가슴 속에 품고 있을 거 같고...

척력에 가슴 찢어지는(오늘 왜이리 가슴 남발? ㅠㅜ) 연인의 눈물조차도 흠뻑 품어줄 수 있을 거 같단 말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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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2-06-27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태용 작가의 '숨김없이 남김없이' 란 소설 혹시 보셨는지요. 제 경우 상당히 힘들게 읽었는데, 이 책도 그러한 시도였을까 궁금해지네요.

글샘 2012-06-27 17:06   좋아요 0 | URL
그 책은 모르겠네요. ^^ 암튼, 이 책은 소설은 아닌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