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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VS 철학 - 동서양 철학의 모든 것, 철학 대 철학
강신주 지음 / 그린비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시도 자체가 신선하다.
그런데... 대결 구도에 어울리는 철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아닌 철학자들도 있게 마련인데...
그걸 꼭 vs 구도에 넣으려다 보니 무리한 구석도 있는 듯...
그렇지만, 철학이든 문예 사조든...
이전 시대의 정설로 받아들여진 패러다임에 문제제기를 하고,
반대되는 의견의 구조를 수립하려던 거였다보니... 강신주처럼 설명하는 것이 일리가 있기도 하다.
그치만, 모든 철학자들이 그런 구도에서 명확히 대립되는 것은 아닌 바...
더 치중하여 설명하고 싶은 철학자와 개념도 있었을 거고,
가벼이 넘기고 싶은 철학자도 있었을 건데... 암튼, 이런 대작을 기획하여 밀고나온 힘이 부럽고 대단하다.
내가 이런 작업을 할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한다면,
같은 시대에 이런 젊은 철학자가 모국어로 책을 왕성하게 쓰고 있다는 것에 감사할 노릇이다.
강신주는 '정신적 키가 한 뼘 정도 자랐다'는 말을 좋아한다.
철학 서적을 탐독한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땅딸보 철학자 신드롬'이다. ㅋ
그래서 자기가 무지 큰 줄 알고, 늘씬한 줄 알고, 맨날 짝붙는 티를 입으시나부다.
그게, 철학의 장점이기도 하고, 약점이기도 한데,
정신적 성장을 도와주는 점이라면,
철학에서 활용되는 언어가 상당히 도식적이고 분석적이어서 현상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틀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는 점이다.
그러나 철학적 사유가 주는 약점이라면,
인간의 삶은 늘 뼈대로만 이뤄지지 않고, 실존 인간이 놓인 시대적 사회적 주변 상황과 배경을 고려하여 복잡하고 유기적으로 이뤄지는 것이어서, 그 사유의 토대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일은 자칫 오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특히 한국처럼 이데올로기의 각축장이었던 곳에서는,
말잘하면 공산당... 취급을 받았던 바,
철학하면 말잘하게 되고, 바로 매카시즘의 공격 대상이 되기 십상인 것이었고...
그래서, 철학적 토론의 토양은 백안시되었던 곳이 이 나라였다.
타자와의 마주침에서 새로운 배치, 즉 아장스망을 실현하는 일로 인해,
내가 영위해온 삶의 규칙은 완전히 새롭게 재편된다.
타자가 가능 세계라면, 나는 과거의 한 세계이다. (160)
들뢰즈의 한 마디는,
철학이 만들어주는 위험한 인간을 규정한다.
타자가 '하나의 위협적인 세계의 가능성'이라면,
철학 역시 '위협적인 세계관의 가능성'을 가진 도구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 속에서는 '사랑'의 문제에 탐닉할 수밖에 없는데,
라캉의 <욕망 = 요구 - 욕구>의 공식으로만 해결되는 건 아니고,
바타유처럼 "에로티즘은 사회적인 것"이라고 규정하는 일도 큰 의미가 있다.
최근 한국의 젊은이들이 <쿨한 사랑>을 외치는 것 역시, 삶의 조건의 팍팍해진 사회적 반영임을
정이현의 <사랑의 기초>에서 명확히 짚어내지 못하는 일 역시, 바타유를 제대로 못 봐서 그렇다.
같은 작업을 한 알랭 드 보통의 책이 사랑의 본질에 명확히 다가가는 것을 보면,
철학은 세상을 바라보는 명확한 시선을 제공하는 [지혜안]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하긴, 세상은 늘 대립의 연장이다.
강신주가 툭하면 내미는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은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것>이란 말에 대적하는 아감벤.
아감벤은 <정치가 존재하는 것은,
인간이 언어를 통해 자신에게서 벌거벗은 생명을 분리해 내며,
그것을 자신과 대립시키는 동시에 그것과의 포함적 배제관계를 유지하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라고 하며 푸코를 계승한다.
이렇게 나누는 일 역시 쉽지 않은 바,
강신주의 철학적 전통에 대한 통찰이 이 책을 이끌어 냈다면,
앞으로도 더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책들로 그 간극을 가득 채워주길 바라는 마음이 크다.
서양철학자에 버금갈만큼 훌륭한 동양 철학의 그림도 다양한데,
그의 동양철학사가 목하 집필중이어서 그 부분에서 더욱 세밀한 그림을 그려주길 바란다.
철학자라도 보고싶지 않을 철학 사전에 비하면, 이 책의 발견이야 말로,
<평행으로부터 어긋나는 미세한 차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것 같은 미세한 편차>를 칭하여,
루크레티우스가 설정한 <클리나멘>의 순간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