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원하는 천사 문학과지성 시인선 411
허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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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갑을 만나면 반갑다.

그리고 그의 시들에서 읽히는 삶의 흔적은 나의 그것으로 쉽게 치환되어 버린다.

한편 좋고,

한편 아프다.

 

허연의 이전 시집에서 기억에 남는 시는 아래 시다.

 굳은 채 남겨진 살이 있다. 상스러웠다는 흔적. 살기 위
해 모양을 포기한 곳. 유독 몸의 몇 군데 지나치게 상스러
운 부분이 있다. 먹고살려고 상스러워졌던 곳. 포기도 못했
고 가꾸지도 못한 곳이 있다. 몸의 몇 군데


 흉터라면 차라리 지나간 일이지만. 끝나지도 않은 진행
형의 상스러움이 있다. 치열했으나  보여 주기 싫은 곳. 밥벌
이와 동선이 그대로 남은 곳. 절색의 여인도 상스러움 앞에
선 운다. 살은 굳었고 나는 오늘 상스럽다.


사랑했었다. 상스럽게.     

<살은 굳었고 나는 상스럽다, 전문> [시집 ‘나쁜 소년이 서있다’에서]


굳은살과 상스럽다는 말이 '사랑스럽다'는 말도 떠올리는 한편 서러움을 환기한다.

아마도 내 마음 속의 굳은살...

그 상스러워 감히 내어보이지 못한 흔적,

그러나 그 상스러움 속에선 치열함이 가득했을... 그것들에 대한 애착이

이 시를 기억에 남게 했나보다. 

 

이 시집의 표제시, 내가 원하는 천사, 는 귀엽다. ^^

 

천사를 본 사람들은 / 먼저 / 실망부터 해야 한다.//

천사는 바보다./ 구름보다 무겁고,/ 내 집게손가락의 굳은살도 /해결해주지 못한다.//

천사는 바보이고/ 천사는 있다.//

천사가 있다고 믿는/ 나는/ 천사가 비천사적인 순간을 / 아주 오랫동안 상상해왔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 천사를 떠올린다.//

본드 같은 걸로 붙여놓았을 날개가/ 떨어져 나가는 바람에/ 낭패를 당한 천사. / 허우적거리다 / 진흙탕에 처박히는 천사.

진흙에 범벅되는 하얀 인조 깃털 / 그 난처한 아름다움.//

아니면 /야간 비행 실수로 /낡은 고가도로 교각 끝에/불시착한 천사//

가까스로 매달린 채 / 엉덩이를 내보이며 / 날개를 추스리는 모습이 그려진다.//

아니면/ 비둘기 똥 가득한/ 중세의 첨탑 위에서/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측은하게 지상을 내려다보는/ 그 망연자실.

내가 원하는 천사다. <내가 원하는 천사>


이런 인간적인 천사가 있나? ^^

그렇지만, 그 천사는 어디에나 있을 법한 존재로 친근하게 다가온다.

 

이 시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시는 '덧칠'이다.

'덧칠하면서 사는 나이'에 마음이 매여서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난 오늘 덧칠을 시작했다'에서 다시 '덧칠'이 마음을 '덧나게' 한다.

나이는 이런저런 생채기, 또는 굳은살을 애써 무시하며 살게하는 역할을 한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싫은 어두운 한켠에 덧칠을 한다.

애써 칠한 그 '덧댐'은 그러나... 흉한 결과를 낳고,

의도한 감춤에는 실패하고, 오히려 굳은살의 위치만을 더 두드러지게 보여준다.
덧칠을 하면서 헛됨을 깨닫게 되는 것.


 덧칠하면서 사는 나이다. 낡은 목선에 켜켜이 붙어

있는 페인트의 두께에서 어떤 절지동물 사체들이 묻

혀 있는 굴곡이 보인다. 기생하면서 살아온 것들, 고

래와 목선을 구분하지 못했던 것들, 그 위에 덧칠된

울퉁불퉁한 굴곡들. 뜨거운 게 치밀어 올라온다. 난

오늘 덧칠을 시작했다.


 목선에 들러붙은 지독한 것들에게. 온몸이 가려워

지는 그들의 생존 방식에 대해 짠물에도 살아남은 그

들의 묵묵한 인내에 경배한다. 하나하나의 이름은 모

른다. 하지만 진화에서 빗겨 나간 과묵함이 눈물을

핑 돌게 하는 풍경임은 분명하다. 나는 얼마나 작은

가. 숨죽이며 발목을 잡는 건 자책이다. 짠물에 씻겨

나가지 않은 사체의 세월이 나의 노래이기를.  <덧칠>


그의 이번 시집에서 읽히는 몇 개의 사랑 노래.

 

 얼음을 나르는 사람들은 얼음의 온도를 잘 잊고,

대장장이는 불의 온도를 잘 잊는다. 누군가에게 몰입

하는 일. 얼어붙거나 불에 타는 일. 천년을 거듭해도

온도를 잊는 일, 그런 일.(얼음의 온도, 전문)


사랑을 '잊음'에 빗대면 어떨까?

낯선 사람에겐 깜짝 놀랄 일인 얼음의 온도, 불의 온도도,

익숙해진 사람들에겐 잊히는 것.

천년을 거듭해도 잊기 쉬운... 익숙해짐... 뭐, 그런 일...

사랑의 반대켠에 놓이는 이별.

그 이별의 마당에서 '노래'를 줍는다.

노랫말 속에서 풍겨나는 '기억'은 추억뿐만 아니라 회한이기도 쉽다.

너무도 길고 긴... 견디기만 하라는 말.

이별노래 치고는 저미는 노래인데... 그 저밈이 '서리'의 촉각으로 시리다.

 

 노래로 늙어갈 줄 알았다면 그 말의 무늬와 바람의

색깔과, 차가운 새벽의 냄새를 기억해 놓았을 텐데


 밤이 오고 또 밤이 가는데. 견디는 모든 것들은 화

석이 되고 새들은 또 날고. 오늘 아침 철로변에서 그

리움은 서리로 내리고. 또 그대는 견디기만 하라 하고


 그대의 날들은 너무 길고 길어서. (別於曲, 부분)


그 이별 노래를 부르는 이,

시정잡배지만, 노래 한 곡에 담을 사랑은 무엇일까?
모든 유행가 가사가 자기를 향해 날아드는 화살촉처럼 아픈 심장에게

세상살이는 죽을 만큼 아프다.

그 아픔은 눈물 한 방울 난다.


술국 먹다 말고 울컥 누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가물가물하지만 무지 아팠다. 죽을 만큼 아팠다.

그 술국에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고 또 웃는다.

잊어버리는 건 쉽지만

다시 떠오르는 건 막을 수가 없다.

그게 시정잡배의 사랑이다.


마지막으로 십팔번 딱 한 번만 부르고 죽자. (시정잡배의 사랑, 부분)


그의 십팔번이 무슨 곡이든...

눈물이 핑 돌게 부를 것임은 자명하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이 쉴 곳 없네'가 되었든,

'비내리는 호남선 남행 열차에 흔들리는 차창너머로 빗물이 흐르고 내눈물도 흐르고 잊어버린 첫사랑도 흐르네'가 되었든,

십팔번 한 번 부르고 죽고 싶을 정도로 흐느낌과 오열이 뒤섞일 것이다.

 

눈물은, 빗방울이고, 그 빗방울은 부서진다.

부서지는 빗방울이 아프다.

핏방울이 튀듯, 통증으로 가득하다.

불통의 통증은, 뼈아프게 서있는 나무가 되어,

움직일 수 없는, 자라지 못하는 아픈 나무가 그저 비맞으며 서 있을 뿐이다.

 뭔가를 덮어놓은 두꺼운 비닐을 때리는 빗소리가

총소리처럼 뜨끔하다. 기억을 두들겨대는 소리에 홀

려 빗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빗속에 들어가 나무처럼

서 있다.


 언제나 어깨가 가장 먼저 젖는다. 남들보다 좁아서

박복한 어깨가 비를 맞는다. 금서의 첫 장을 열듯, 빗

방울 하나하나를 본다. 투명 구슬처럼 반짝이며 떨어

지는 물방울의 마지막 순간을 본다. 자결하면서 쏟아

지는 유리구슬. 핏방울이 튀듯 투명 구슬이 튄다.


 마당 하나 가득 깨어진 구슬로 가득하다. 나는 여

전히 개어진 구슬 한가운데 서 있다. 구슬이 나를 때

린다. 뼈로 들어서는 통증. 나는 뼈아프게 서 있는 나

무다. 자라지 못하는 나무다. (자라지 않는 나무, 전문)


지구가 멸망한들,

지구는 잿빛으로만 남지 않는다.

거기서 명도가 살아나는 색채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름답다.
그 생명체가 고양이라면, 더 아름답다. 생생하다.


 무너져버린 콘크리트 더미 사이에서 고양이들이 짝

짓기를 한다. 순식간에 장르가 바뀐다. 에로다. 며칠

전까지 이곳에서 벌어졌던 중장비들의 공포는 이미 잊

혔다. 족보 한 장이 이렇게 쉽게 넘어갈 수 있을가.


 몰락은 사족 없이도 눈부시다. 내밀한 서사가 창자

밀려 나오듯 밀려 나와 있는 몰락은 눈부시다. 미리

약속하지 않았으므로 몰락은 눈부시다. 그리고 그 몰

락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짝짓기란.


 무거웠던 것들이 모두 누워버린 몰락의 한가운데서

고양이의 배 속에 담겨 날아온 씨앗들도 싹을 틔우리

라. 똑바로 서 있던 벽돌의 모습은 고양이들에게 더

이상 기억되지 않으리라. (몰락의 아름다움, 전문)

 

그러나, 그의 사랑은 몰락만은 아니다.

사랑은 신전을 만든다.

신전에는 유전자의 기록 외에도,

잊혀지기 싫어하는 마음을 담아 기록을 한다.


영원히 살 수 없으니까 사랑을 하는 거다

따지고 보면

기껏 유전자나 남기고자 하는 일이다


비극은

피하고 싶다고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데 있다.


어쨌든

기억에서조차 사라지는 게

사랑이다 보니

사람들은 무엇인가 쓰기 시작했다


신전 기둥에 남긴 사랑도

그저 기록일 뿐이다


겁내지 말라고

내가 다 기록해놨다고

죽어도 죽는 게 아니라고

남자는 외치지만

여자는 죽어간다.

신전은 세워지고 있지만 여자는 여전히 죽어간다


죽어가는 여자보다

사랑을 잊지 않으려는 남자가

진화상으론 하수다 (신전에 날이 저문다, 부분)


진화상으로 하수인 남자.

그 남자의 기록이 이 천사의 기록이다.

신전의 기록과 천사의 타락...

 

날은 저물지만,

사랑은... 그 굳은살과 아림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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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12-05-24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이상 사랑의 기적을 꿈꾸지 않지만,
사랑했으므로, 사랑함으로 우리는 삶을 이어가는 게 아닐까 싶어요...

글샘 2012-05-25 11:34   좋아요 0 | URL
사랑이 기적일까요? ㅋ
좋네요... 사랑으로 이어가는 삶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