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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재발견 - 다산은 어떻게 조선 최고의 학술 그룹을 조직하고 운영했는가?
정민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8월
평점 :
낙수...의 추억
옛날 기와집 내지 슬레이트 집의 지붕에선 비올때 늘 같은 자리에서 물줄기가 떨어졌다.
그 낙숫물 듣는 소리가 주룩주룩, 또는 뚝, 뚝, 들릴 때,
마음이 차분해 졌다.
낙수...의 기억
대학신문에 낙수(落穗)라는 칸이 있었다. 사전을 찾아보니 이삭줍기란 뜻이었다.
그 칸에는 잡다한 소식들이 실려있었던 거 같다.
다산 정약용에 대하여 천착하던 정민 선생이 다산과 관련된 자료를 찾아서 전국을 뛰어다닌 흔적이다.
다산의 연구 방법을 '지식경영법'이란 책으로 묶어냈는데,
미진하거나 새로운 자료들을 만나면 온갖 인맥과 방법을 동원하여 자료를 찾아간다.
그야말로 낙수치고는 치밀한 빗질(combing)이다.
다산의 강진 시절을 사의재 시기, 보은산방 시기, 이학래가 시기, 다산초당 시기로 나누고 있다.
다산의 교학 방식에서 기억해둘 만 한 것은, 그의 다양한 단계이다.
단계별, 전공별, 맞춤형, 실전형, 토론형, 집체형 교육.
지금도 다양한 교육 방식을 시절에 따라 돌려가며 유행시키는 것이 교육 정책이라고 내세우지만,
소수 정예 교육이었기에 가능하였을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자료들을 읽는 점은, 디테일한 점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정으로 가늠해서 마땅히 자주 와 보아야만 한다.
그런데 몸을 정할 계책을 보면 내 편지를 보고서도 여태 미황사에 눌러앉아 있으니
절집의 술과 국수는 중하고 이 늙은이의 편지는 가벼운 게로구나.
지나면서 들르지도 않고, 편지를 보내도 답장도 없으며, ...
네 마음대로 하거라. (77)
제대로 삐쳤다. ㅋ
조선 시대, 기록이 중요한 것은 소통의 방식이 다양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자료들이 편지로, 문집으로 채록되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자료들을 제대로 분석해 읽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데,
정민은 젊으면서도 이런 작업에 꾸준히 참여하는 훌륭한 학자이다. 고마운 일이다.
이상적 주거에 대한 생각과
지기의 역할을 하는 고사운승(高士韻僧)이 있어야 한다고 한 부분도 재미있다.
사방 수십 리에 고사와 운승 대여섯 사람과 맺어 벗으로 삼고,
매번 꽃 필 때면 서로 초대하여 운자를 내어 시를 짓는다.(351)
가난한 생활과 그 속에서도 불쌍한 이를 돕는 구휼의 정신과 근검의 태도가 잘 드러나
비로소 '청복(淸福)'이 완성되는 경지를 추구하는 정신을 잘 드러내고 있다.
다산이 추사에게 보낸 편지, 초의와 나눈 대화 등이 실린 자료들이 많이 남아있을 수 있었음은
오히려 소통의 수단이 부족하였던 시대를 살았음을 생각하면...
지금처럼 소통의 수단이 다양하고 풍부한 시대가 지나면,
오히려 역사의 미시사 부분을 밝힐 수 있는 기록들은 적어지는 역설도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후벼파면 팔수록 다양한 자료들을 만날 수 있는 해설집이다.
정민 선생의 건필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