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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온 바다 ㅣ 창비시선 346
곽재구 지음 / 창비 / 2012년 4월
평점 :
사평역에서...의 시인 곽재구, 그의 포구 기행은 조금 싱거웠단 리뷰를 올렸던 기억이 아슴하다.
사평역에서...가 워낙 인간에 대한 따뜻함을 가득 품은
톱밥난로같은 시여서, 1980년대 민중시의 시대에 사랑을 받았다.
이제 '와온(臥溫)'에서 세상을 낙타처럼 바라보며
와온 바다란 이름처럼, 누워서 따뜻한 눈으로 세상을 응시한다.
그 시선은 와온에서뿐 아니라, 이국땅에 이르러서도 여전하다.
인간은
해와 달이 빚은 알이다
알은 알을 사랑하고
꽃과 바람과 별을 사랑하고
삼백 예순날
개펄 위에 펼쳐진 그리운 노동과 음악(와온 바다, 부분)
순천만 가까운 풍경이라는데,
시선이 신화에 다가가서 세상을 다사롭게 바라보는 관점이 신선하다.
오늘도 고통의 길 떠나는 그대여
이제부터 그대를 고니라고 부르겠다
젖은 옷소매
핏발 선 두 눈 부비며
먼 도시의 불빛 속 날아오르는 그대여
날아오르다 자꾸만 숨차 주저앉는 그대여
이제부터 그대를
고니라고 부르겠다(고니, 부분)
영화 '타짜'의 주인공이 '고니 또는 곤이'였다.
장자의 '곤'도 떠오르고,
물아래서 부지런히 발짓해야 떠있을 수 있는 '고니'도 떠올랐는데...
우아해보이는 삶들은 모두 그렇고 그런 삶의 길을 떠나고 있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인간인 내가
인간이 아닌 나무에게
음악을 들려주고 싶을 때
나무는 고요히 춤을 춘다
인간이 아닌 나무가
인간인 내게
시를 읽어주고 싶을 때
나무는 고요히 춤을 춘다(나무, 부분)
자연과 교감하는 모습이 이 시집에서 두드러지는데,
그 교감이 춤이 되는 경지도 멋지다.
열두살이 될 때까지
나는 할머니 젖을 만지고 놀았다
할머니 젖은
까맣고 쪼글쪼글한데
어떤 날은
산머루 같기도 하고
산오디 같기도 해서
입을 앙 벌리고
한입 덥석
베어 물기도 했는데
마당귀
갓 핀 수선화꽃들
입 앙앙 벌리고
한입만 줘
한입만 줘
노랗고 환한 그 소리들
참 듣기 좋았는데(수선화, 전문)
수선화가 좋다는 사람을 보면,
이제 이 시가 떠오를 것이다.
할머니 까만 젖을 달라고
노랗고 환한 그 소리를 울리는 장면과 함께 말이다.
나룻물 강생원은
젊어서 제월리 나루터의
뱃사공이었지요
배가 남원 땅에 닿으면
장꾼들에게 꼭 이렇게 말하지요
어 참 봄볕도 좋다
돌아올 때 꽃 한짐 꺽어오시오
이를테면 그 말이 곧 뱃삯이었는데
장보고 오는 동네 사람들
돌아오는 길에 진달래꽃 꺾고
살구꽃도 꺾고
수선화꽃이랑 조팝꽃도 실컷 꺾어서는
한 아름씩 강생원에게 주었겠지요
다시 강을 건너며
나룻물 강생원은 꼭 이렇게 말하지요
어 참 꽃 좋다
어 참 세상 이쁘다 (나룻물 강생원의 뱃삯, 부분)
박경리 토지의 주갑이를 떠올리게 하는 시다.
꽃이 좋고, 그래서 세상 참 이쁜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배운 사람, 가진 사람보다 더 가진 사람이다.
내 마음이 가는 그곳은
당신에게도 절대 비밀이에요
아름다움을 찾아 먼 여행 떠나겠다는
첫 고백만을 생각하고
당신이 고개를 끄덕인다면
그때 나는 조용히 웃을 거예요
알지 못해요 당신은 아직
내가 첫여름의 개울에 발을 담그고
첨벙첨벙 물방울과 함께 웃고 있을 때에도
감물 먹인 가을옷 한벌뿐으로
눈 쌓인 산언덕 넘어갈 때도
당신은 내 마음의 갈 곳을 알지 못해요
그래요 당신에게
내 마음은 끝내 비밀이에요
흘러가버린 물살만큼이나
금세 눈 속에 묻힌
발자국만큼이나
흔적 없이 지나가는 내 마음은
그냥 당신은 알 수 없어요
알 수 없어요 (선암사 은목서 향기를 노래함, 전문)
마음을 바라보는 일, 가장 어려운 일이다.
흔적 없이 지나가는 그 마음을...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으나... 바라보아야 할 때가 있는 법.
그의 산문집 <우리가 사랑한 일초들>은 인도 기행이란다.
순간(눈 깜박할 사이)이나 찰나(순간의 수천 분의 1)라는 과장어법보다는, 일초가 이쁘다.
그 일초, 한초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마음.
그 마음도 이쁘다.
미스티 가게 앞
자전거를 멈춘 연인들은
세월이 잠시 그들 곁에
멈춘 것을 알지 못하지
페달 위에 올려진
푸른 밤의 발 하나
죽은 시인의 언어들이
페달 위에서 가벼운 탄식을 올리는 동안
남은 한 발이
지상의 가장 성스러운 장소와 입맞춤하네
한초
한초
우리에게 남은 시간들은 흘러가지
당신이 내게
내가 당신에게
보낸
한초 한초를 싣고
우리는 또
반딧불이 날아오르는 산티니케탄 대로를 달려가지 (우리 곁을 흘러가는 따뜻한 일초들, 전문)
한초 한초를 당신에게 보낼 줄 아는 마음.
반딧불이로 날아오르며 서로 사랑할 줄 아는 마음.
가장 성스러운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