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하정우, 느낌 있다
하정우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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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알아는 듣지만 사용하지 않는 말도 알고 있다.

'잔돈은 됐어요.' 이런 말들... ㅋ

뭐, 어떤 네가지 없는 여고생은 4만원짜리 피자를 시키고 10만원짜리 수표를 내밀고는,

저런 언어를 구사했단다. 음... 역시... 나는 사용할 수 없는 말임에야...

 

군대를 갔다온 남자 동물들이나 쓸 수 있는 말이 있다.

~하지 말입니다... 이런 말이다.

고참에게 절대로 ~인데요, 같은 말이나 사투리로, ~인데예, ~라고라~ 했다가는 혼나기 십상이다.

군대 용어는 격식체를 갖춰 써야 하므로 '~다, ~까'로 마쳐야 하는 것은 어법에도 맞다.

그렇지만 예전 언어가 시골틱했을 때, 툭하면 사투리 표현이 나왔을 거고, 그래서 줘터지는 일은 흔했다.

그래서 나온 용어,

30대 성인 남자이지 말입니다...

이 어휘를 구사하는 하정우에게 괜히 소주를 한잔 사고 싶다.

말띠 띠동갑이니 뭐, 내가 한잔 산다고 그가 뭐라하진 않을 성 싶다.

 

하정우의 배우로서의 매력은 이 책에서 주가 아니다.

그의 힘들던 시절, 아버지 김용건의 캐릭터는 뭐, 무지 잘나가는 스타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명도 아닌,

딱, 전원일기 김회장댁 장남의 이미지로 굳어진, 그런 것이었는데,

서울의 달에서 춤선생으로 등장했을 때, 왠지 좀 어색한 그런 느낌도 나는 인물이었다.

그 아들이라고는 하지만, 하정우의 캐릭터는 '추격자의 지영민'으로 굳어졌다.

국가대표의 스키선수나 황해의 조선족, 범죄와의 전쟁의 깡패와는 다른 배우로서의 탁월함을 보여줬던 것 같다.

 

지영민의 캐릭터에 딱 어울리는 짓을 하정우는 하고 있었다.

혼자서 몰두할 수 있는 일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

혼자 있는 시간에 고독하다고 몸부림치기보다는, 그 혼자의 시간을 가득 채울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이 나이에 상관없이 멋진 사람이고, 그래서 그런 사람과는 왠지 소주라도 한 잔 나누고 싶어지는 거다.

 

그의 그림은 그의 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예술과 광대에 대한 생각들과 자유분방한 사고 방식,

고리타분한 세계에 대한 저항과 일탈 대신, 예술로의 승화.

그래서 그의 인물들은 미녀나 몸짱은 거부하고, 자유로운 영혼을 나타낼 수 있는 자유로운 필선과 색으로 채워진다.

그의 그림은 그의 것이므로, 자유다.

 

파란 색은 조금 답답해보인다. 지나치게 조심스러워보인다.

노란색은 왠지 모르게 정상이 아닌 것 같은 느낌.

이런 파란색과 노란색을 함께 쓰면 서로를 다스리면서 재미있는 느낌을 만들어낸다.

'조심스러운 파란색'이 '미친 노란색'을 만나면 정직한 척하면서도 자유로운 느낌이다.

격식차려 꼭 맞는 슈트를 입고 있는데도 더할 나위없이 편안한 사람을 보는 듯...

 

빨간색은 영 불편하다.

이런 빨간색도 검은 색을 만나면 고급스러워진다.

검은색은 무표정한 얼굴처럼 힘이 세다. 화난 사람의 얼굴보다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의 표정이 더 두려움을 준다.

빨간색은 검은색 옆에서 한결 차분해지고 고상해진다.

다 드러내려는 빨강이 속을 완전히 감춘 검정을 만나 균형을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정말 중요한 것은 어떤 색을 사용할지 결정하는 일이 아니라,

어떤 색과 <함께> 사용할지 결정하는 일이다.

'조합'을 거쳐서 각각의 색깔이 가진 부족한 점들이 보완되기도 하고

기대 이상의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내기도 한다.(64)

 

화가나 배우가 적은 글 치고는 상당히 멋진 통찰이 잘 드러나 있다.

그가 오래 그림을 그려온 느낌이 잘 살아난다.

캔버스에 유화 등으로 표현하는 그림이 많아 색이 잘 어울리지 않으면,

수채화나 수묵화의 번짐이나 투명한 느낌을 주기 힘든 그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이 색상론은 인생론이나 사랑론에까지 번져 써도 어울리지 않겠나 싶다.

사람은 그 사람의 인격이나 개성보다,

그 사람이 누구와 함께 어울려 번지고 물들어가는지를 보고 판단하는 일이 흔하니 말이다.

 

대부와 러브어페어를 이야기하다가, 인생론에까지 번진다.

 

물이 끓을 때 불을 줄이면 금방 가라앉는다.

그렇다고 물이 차가워진 것은 아니다.

슬픔 역시 삼킨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말런 브랜도는 절제된 감정 표현이 더 격렬한 슬픔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멋지게 연기한다.

 

슬픔에 대한 고뇌는 배우라면 깊이 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삶에 대한 고뇌, 고독에 몸서리치는 삶에 대한 체험은 겪어보지 못한 자가 허투루 소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슬픔과 끓는 물의 비유를 보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고 쓰는 글인지, 느낄 수 있다.

 

훌륭하신 분들이 선거 전에 마구 내놓는 자서전들에서는 멋진 구절들이 많다.

대필 작가들이 훌륭하기 때문이다.

하정우의 글들은 문체가 거칠다. 그게 그의 글이 멋진 이유다.

문체는 아마추어의 그것이지만, 인생은 프로인 것이 멋진 자서전의 조건이다.

프로의 문체를 빌려서 쓰는 윤색된 돈많은 인생들의 인생이 결국 아마추어처럼 초라한 것도 그러한 이유고.

 

그의 사랑 이야기는 건강하다.

결혼 정보 회사를 비꼬면서 하는 그의 사랑 이야기...

 

내 손가락이 저 사람의 손가락에 살짝 닿았으면 좋겠다.

내 손으로 그사람의 손을 꽉 잡아 놓치고 싶지 않다.

그 사람을 내 쪽으로 당겨서 깊숙하게 끌어안고 싶다...

 

진짜 사랑은 오가닉한 것이다.

몸과 마음을 열고 느끼는 것이다. 다른 외부 조건들을 잊고 서로에게 빠져드는 것이다...

이렇게 사랑은 쉽게 빠져드는 감정인 동시에 어렵게 쌓아가는 관계이기도 하다.(213)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연기와 연출을 보면서 이렇게 적는다.

 

꿈을 빨리 이루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꿈이 충분히 익을 때를 아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배우로서, 화가로서,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철학이겠지만,

특히 이 책과 관련지어 화가로서, 무르익어가려는 그의 태도에 박수를 보낸다.

 

인간의 과거는 모두 미로처럼 엉켜있다.

그 시간은 지날수록 희미해지고, 엉켜있는 실타래는 끄집어내려 할수록 더 헝클어지고 만다.

그 기억의 실마리는 여간해서 솔솔 풀려나오지 않는 법인데,

하정우의 그림그리기는 그런 면에서 과거를 기억하는 가장 좋은 기억법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그런 면에서 그의 대본 공부하기, 습작 데생 들도 삶에 대한 애정을 가장 적극적으로 보여준 페이지들이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은 결국 삶에 대한 사랑에서 우러나는 카페인 같은 것이다.

그 카페인에 중독되어 삶이 더 황폐해지기도 하지만,

그 카페인이 사람을 더 활력있게 만들기도 하는 법이니...

 

결국, 삶의 화두는 사람과 사랑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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