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머 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장 자끄 상뻬 그림 / 열린책들 / 199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가을비가 촐촐하게 내리는 아침. 아파트 입구에 스쿨버스를 기다리는 사립초등학교 아이들이

줄을 선대로 분홍빛, 하늘빛, 붉고 노란 빛 우산들이 새초롬하니 비를 맞고 있었다.

몇 시간이 지난 아직도 그 빛깔들은 내 망막에 아른거린다.

그 빛들은 아마 0.1초 가량 내 망막에 스쳤을 뿐인데...

 

간혹 이렇게 순간적인 느낌이 오래 남을 수 있다.

아니면 오랜 동안 잊고 살다가 불현듯 떠오르기도 하고.

푸른 바다에 비낀 노을을 보면서 갑자기 생각나는 옛친구처럼 아련한 기억들.

 

좀머 씨 이야기를 읽고 싶은 아침이었다.

어린아이들 우산을 보고, 이 책의 삽화들이 생각났나보다.

파트리크 쥐스킨스 자신을 좀머씨에 대입시킨 것일까?

 

우리는 이 사회와 어떤 식으로든 연관을 맺고 살지만, 그

 연관이란 것은 아주 연약한 실과 같은 것이 아닐까.

좀머씨처럼 살아도 - 걷고 중얼거리고, 가고 싶은 곳으로 가는... -

사는 것이고, 죽을똥말똥 아둥바둥 살아도 사는 것인데...

 

따가운 햇살이 피부에 따끔거리지만, 금세 찬바람에 스러지는 '여름'처럼 'Sommer'씨는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물속나라로 조용히 사라진다.

글쎄, 우리는 너무 장렬하게 전사하기를 바라는 거 아닐까.

 

꼬마가 죽음을 앞두고 친구들과 가족들의 애도, 축복, 집회를 기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사실 사회적이지만 '동물'인 인간에게 죽음이란 '향수의 그르누이'와 '좀머'씨처럼 소리없이 사라지는 것이 자연스런 죽음이 아닐까. 공

 

병우 박사님의 죽음을 떠올리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자연스러운 죽음.

마치 사자나 들소들이 죽음을 예감하고 조용히 단식을 청하며 평화로이 잠드는 영면처럼...

 

어린아이의 파스텔빛 감성과, 평생 짐을 지고 사는 좀머씨의 아픈 정신과,

 삶의 <평화>를 누리고자 하는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이성을 느끼는 쓸쓸하면서도 가득찬 가을비 내리는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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