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창비시선 344
김선우 지음 / 창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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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 이제 마흔을 넘어가면서,

봄날은 간다~는 노래를 들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난 아직도 창창한 봄이야, 뭐래?'하고 되쏜다. ㅋ

 

그 여자, 봄바람 났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 오늘도 옷고름 씹어 가며 /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 가더라 / 오늘도 꽃 편지 내던지며 /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 / 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유행가 가사)

 

김선우는 천상 여자고, 대지의 어머니의 심장을 가진 시인이다.

그가 마흔 넘어, 봄날은 간다~ 대신,

열띤 볼을 부비며 사랑을 노래한다.

이쁘다.

이뻐 죽겠다.

 

너에게 가는 길이다

무엇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모두 무언가 되고 있는 중인 아침...

만약에 말이지 이 사랑 깨져 부스러기 하나 남지 않는다 해도 안녕 사랑에 빠진 자전거 타고 너에게 달려간 이 길을 기억할게

사랑에 빠져서 정말 좋았던 건 세상 모든 순간들이 무언가 되고 있는 중이었다는 것

행복한 생성의 기억을 가진 우리의 어린 화음들아 안녕(사랑에 빠진 자전거 타고 너에게 가기, 부분)


능글맞게,

프로포즈도 아주 능수능란하게 할 줄 안다.

마흔 넘은 개띠 여자가,

차가운 기계를 싫어하는 여자가,

그 기계에서 막 빠져나온 뜨끈한 가래떡 들고 하는 프로포즈란...

 

그 애띤 사랑이,

정말 말랑하고 명랑해서 눈물겹다.

그가 말랑하고 명랑하게, 라고 말은하지만,

사랑이... 그렇게 명랑하기만 하랴마는,

그의 사랑이 끝까지 말랑하고 명랑하게 달려가기를 빌어 준다.

저기요........ 떡방앗간에서 우리 만날까요

차가운 기계에서 막 빠져나온 뜨끈한 가래떡 한 줄 들고

빼빼로 먹기하듯 양 끝에서 먹어들어가기 할까요

그러니까 우리, 한번쯤 만나도 좋은 때까지 말랑하고 명랑하게 한번 달려볼까요?(떡방앗간이 사라지지 않게 해 주세요)


존재론.

나의 존재가 세상을 가득 메운 인간의 존재를,
한 줄로 무너뜨린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어서 아주 기뻐, 오늘...

제대로 사랑에 빠진 거 같잖은가?


시간은 항상 배가 고프지

너에게로 팔을 벌려 하루살이의 혀로 키스한다

‘안녕’이라고 인사해준 너라는 시집,

“안녕,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어서 아주 기뻐 오늘”

백두 송이 나팔꽃이 핀 담장의 맨 끝에서

오늘의 시집 후기를 읽는다(그 시집, 나팔꽃 담장)


이 시집의 표제시에는,

독특하게 이탤릭체로 된 부분이 사이사이 끼어있다.

전체 시와 맥락이 이어지는 듯, 이질적이다.

그 부분만을 모아보면, 영락없는 연애편지. ㅋ

 

신을 만들 시간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서로를 의지했다

사랑합니다 그 길밖에

우리는 다만 마음을 다해 당신이 되고자 합니다

사랑을 잃지 않겠습니다 그 길밖에

인생이란 것의 품위를 지켜갈 다른 방도가 없음을 압니다

사랑합니다 그 길밖에

지금 마주본 우리가 서로의 신입니다

나의 혁명은 지금 여기서 이렇게(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이탤릭체 부분 모음)


그래,

타자는 지옥이라는 세상에서,

우리가 서로의 신이라는 믿음으로

서로를 의지할 수 있는 사랑이라면,

그래서 마음을 다해 당신이 되고자 하고,

사랑을 잃지 않겠다고 맹세한다면,

그것이 하나의 혁명이 될 수 있다.

사랑은,

모든 개체들의 우연한 마주침에서 연유한 하나의 신선한 혁명일지니...

 

쓸쓸하다,는 형용사

하지만 이 말은

틀림없는 마음의 움직임


쓸쓸하다,를 

동사로 여기는 부족을 찾아

평생을 유랑하는 시인들


유랑이 끝날 때

시인의 묘비가 하나씩 늘어난다 (쓸쓸하다, 전문)


시인의 가슴엔 늘 묘비가 하나쯤 서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묘비는 쓸어볼수록 쓸쓸한 빗돌일 것이고.

그 쓸쓸하다는 것은 정태적 형용사라기보다,

가슴아린, 아슴아슴해서 눈물을 핑~ 돌게 하는,

마음의 움직임을 동반하는 것이어서,

시인은 다시 유랑의 빗돌을 쓰다듬는다.

쓸쓸하게도...

 

시인이 하고 있는 사랑은 그러나,

쉽게 맺어질 것 같진 않아 아쉽다.

그 거리감,

그 적막함,

그 아득함...을 그는 '사람이 살지 않아서 좋았다'고 표현했으리라.

'나라고 할 것이 없어서 아주 기뻐'의 다른 한 짝이다.

가슴 뻐근한 아픔의 양쪽 다리가 아픈데,

그는 운명이란 말이 위로가 된단다.

 

운명이라는 말이 위로가 된다

이것은 처절하고 명랑한 연애 시집이다(시인의 말)


그래, 명랑한 연애 시집 속에

처절한 빗물이 흐르기도 한다.

그래도, 운명이란 말의 위로를 받아들일지,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해서 위로가 된다, 고 쓰고만 있는지...

 

어떤 사랑은, 사랑이되, 자신을 버리고는 지속되지 못한다.

아니 모든 사랑이 그런 것이라고,

그런 것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랑은 그대를 위해 나를 희생하는 일이 아니라, 거꾸로 그대의 삶을 위해 나의 생명력을 북돋우는 일이어야 하는 것이다.(뒤표지, 이장욱의 글)


이장욱이 시집을 읽고,

사랑 이야기를

사랑에 얽힌 존재론을 펼친 이유도,

이런 독서 후기 때문일 게다.

 

이 시집에서 가장 철학적 완성도가 높은 절창은 [내꺼]다.

 

 젊은 여자 개그맨이 TV에서 연애시절 받은 편지를 읽는다

 편지는 이렇게 끝난다[니꺼가]

 세 음절의 그 말을 힘주어 읽은 후 어깨를 편다 젊은 남자 가수가

 노래를 한다 밥을 먹다가 나는 숟가락을 입에 문 채 멍해진다

 '내꺼 중에 최고'가 노래 제목이다 내꺼 중에 최고ㆍㆍㆍㆍㆍㆍ

 

 보채는 당신에게 나는 끝내 이 말을 해주지 않는다

[누구꺼? 당신꺼 내꺼]

 이 모든 소유격에 숨어 있는 마음의 그림자노동,

 그게 싫어, 라고 말하려다 관둔다 내가 좀더 현명하다며

[당신꺼]라고 편안히 말해줄 수도 있을 텐데

 여인을 업어 강 건네준 후 여인을 잊는 구도자의 자유자재처럼

 모두에게 속하고 어디에도 영원히 속할 수 없는

 말이야 천만번 못하겠는가 내 마음이 당신을 이리 사랑하는데

 그런데도 나는 [당신꺼]라고 말하지 않는다

 햇살을 곰곰 빗기면서 매일 다시 생각해도

 당신이 어떻게 내 것인가 햇살이 공기가 대지가 어떻게,

 내것이 아닌 당신을 나는 오 늘 도 다 만 사 랑 한 다ㆍㆍㆍㆍㆍㆍ([내꺼], 전문)

 

햇살이 따갑다.

당신의 머리칼을 곰곰 빗긴다.

그리고 생각한다.

당신의 머리칼 한 올,

내 것은 없다.

 

다만, 오 늘 도 당 신 을 사 랑 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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