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도 병이고 사랑도 병이다 - 변종모의 먼 길 일 년
변종모 지음 / 달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우리가 배우던 유신시절의 국어 교과서에 '이조년의 다정가'란 시조가 있었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 일지 춘심을 자규ㅣ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이뤄 하노라...

 

주제를 봄방의 정취, 정도로 외우고 말았는데,

나이가 들수록, 이 남자의 마음이 가슴에 맺힌다.

배꽃이 달밤에 환하고 은하수가 깔린 한밤중,

꽃가지 잡고 잠못이루는 청춘의 마음을 소쩍새가 어찌 알겠느냐마는,

다정한 마음 갈피를 잡지 못하여 잠 못 이루는 마음이여...

 

변종모의 글을 읽노라면, 이 남자, 참 감성이 풍부하다.

 

사랑은,/ 심장을 빨리 뛰게 하고/ 고통을 진정시키고/ 죽음을 떼어 놓고/ 사랑과 관련되지 않은 관계들을 해체하고/

낮을 증가시키고/ 밤을 단축시키며/ 영혼을 대담하게 만들고/ 태양을 빛나게 한다. (파스칼 키냐르)

 

여행은,/ 맨발을 빨리 뛰게 하고/ 가쁜 숨을 진정시키고/ 얽매임을 떼어 놓고/ 내 삶에 그어진 선들을 해체하고/

모험과 미소를 증가시키고/ 불행을 단축시키며/ 행동을 대담하게 만들고/  내 영혼을 빛나게 한다.

 

이런 귀여운 패러디로 이 책은 시작한다.

여행이 작가에게 주는 의미를 함축한 시다.

 

잘못된 과거란 없다. 다만 잘못되어 가고 있는 현재가 있을 뿐.

아픈 것도 내 추억이며 슬픈 일도 내 추억인데 왜 말하지 못하고 왜 울지 못했던가.

나는 그렇게 우는 연습도 제대로 못한 채 어설픈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비겁하고 나약한 마음이 새벽 강가의 물안개처럼 피어오른다.

내가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와 같은 하늘이 강 위를 떠다닌다.(27)

 

아, 이 남자, 뼛속 깊이 소음인일까?

'어설픈 어른의 비겁하고 나약한 마음'을 관조하는 그가 나는 십분 이해가 된다.

 

사랑은 속으로 상처를 내는 일이다.

그 상처가 단단해져 행복하거나 시들어 병들어 가는 것.

오래된 것들은 사라지고 없어질 줄 알았으나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 일이 분명 있다.(49)

 

그의 여행은 사랑에 대한 상념과 여행에 대한 상념의 대위법으로 이루어진다.

생활의 집을 버린 여행자의 한없는 외로움과,

사랑이 집을 버린 자의 끝없는 쓸쓸한 상처를 어루만지며,

그는 걷는다.

 

생각이 흔들리면 모든 것이 흔들리는 법.

낯선 곳에서 방향을 잃으면 당연히 당혹스럽겠지만, 그것은 길이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흔들리고 생각이 흔들리는 것이다.

잠시 심호흡 한 번 하고 하늘 한 번 쳐다보면 될 것을

나는 살면서 사소한 일에 당황하는 일이 잦았다.

 

이 사람, 소음인 맞다.

늘 흔들리는 나침반처럼, 생각이 흔들리는 사람.

그렇지만, 마음이 흔들릴 때, 소음인은 흐름을 타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작은 기운의 장점은 그런 것이다.

 

사랑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이별한 적도 없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꿈을 꾸며...

막연하지 않은 막막함, 설레는 익숙함, 덤덤하면서도 가슴뛰었고, 불안하면서도 확신이 있었다.

 

쿠바행을 이렇게 달뜨게 표현했다.

그래, 이런 사랑도 있는 법이다.

오히려 이런 사랑이 더 뜨거운 법이다.

 

서늘한 공기가 구름에 섞여 공중을 산책하고 있다.

나는 잠시 그 구름 속에서 눈을 감는다.

나는 왜 내가 만든 상상 앞에서 실망하는가?

아무도 내게 먼저 사랑해달라고 한 적이 없는데 말이다.(115)

 

환상의 도시 마추픽추 앞에서 그의 겸손.

그는 어지간해서 '풍경' 사진을 찍지 않는다.

웃는 사람, 아이들, 실루엣, 아름다운 표정이 조금 비친 뒷모습, 이런 인간을 그의 프레임 속에 가둔다.

그렇지만, 그도 마추픽추와 우유니 사막 앞에서는 무장해제 당하고 '풍경'에 매료된 모양이다.

프레임도 없이 찍어댄 것이 그대로 하나의 앵글을 이룬다.

 

세월은 떨어지는 꽃가루보다 빠르게 진행되어 이렇게 어두컴컴하게 남는다.

누구의 시간인들 그 떨어지는 꽃가루들을 피할 길 있겠는가.

모두가 떨어지고 나면 흔적 없이 쓸려나갈 시간 앞에 무기력한 마음이 무겁다.

화무십일홍 인불백일호,

꽃은 열흘 붉은 것 없고 사람 백일 한결같이 좋을 수 없다 했으니,

영원하지 못할 것들 앞에서 함부로 애틋해서는 안될 일이지만,

나는 오늘 이 축제의 뒷골목에서 쉽게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애틋한 마음으로 지는 해를 바라본다.

나는 왜, 저 떨어지는 꽃잎을 바라보면서도 영원하리라 믿으며 사는 것일까?

그리 살아도 되는 것일까?

 

무연하게 앉아 병을 파는 할머니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어쩌면 그 할머니도 '사람을 쬐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출발지와 목적지의 중간에서 자신을 생각해보는 시간.

그 시간들은 여행보다 간절하고 여행보다 현명한 시간이 아닌가 한다.

 

작가의 여행을 따라다니면서 얻는 이런 생각들은 독자의 시선을 깊어지게 한다.

 

나의 외로운 시간과 외로운 마음을 달래러 왔다가

또다른 외로움을 느끼고 마는구나.

그래도 이런 종류의 외로움은 참 따뜻하다.

당신들의 선한 마음이 나를 참 외롭고 따뜻하게 만드는구나.(243)

 

여행에서 만나는 따뜻함. 외로움 속의 온기.

그것이 인생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서도 느끼고 싶어하는 온기일 거다.

 

빨리 만나고 빨리 이별하고 질감없이 사랑하고 상처없이 이별하는 세상.

답답하면 갈아 신으려 하고 싫증나면 교체하려고만 하는 세상.

온몸을 다해 부딪쳐본 적 있었나?

그 맨발로 누군가를 업어본 적 있는가?

그렇게 대신 걸어본 적 있는가?

자신도 아프면서 상대방에게 다가간 적 있는가?

이제 맨발처럼 살아보리라.

거친 길에서 아파도 하고 부드러운 길에서 수굿하기도 하면서

그래서 피가 나게 다시 사랑도 해보고 굳은 살이 박이듯 호들갑스럽지 않게 지난날도 잊어보리라.(255)

 

그의 굳은 사랑론이 오히려 쓰라리다.

그렇기에 오히려 더 든든하기도 하다.

 

사는 데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설명이 될 수 있기는 한가?

나는 설명서에 친절하게 적힌 방법론을 부정하고 산 지 오래다.

따라해본들 완벽한 치유란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아니까.(332)

 

그의 여행기는 어머니의 부음으로 중동무이되고 만다.

삶은 그런 것이다. 매뉴얼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

 

여행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지구를 몇 바퀴 돌아도 세상을 몇 번을 살아도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변하지 않는다는 것.

여행은 낯선 곳을 찾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낯선 곳에서 익숙한 자신과 만나는 일이다.(333)

 

이 마지막 구절,

꼭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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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21 1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2-03-21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꼭 새겨둘 좋은 말이네요. ㅋ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이뤄 하노라..."

"어쩌면 그 할머니도 '사람을 쬐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 짠하네요.


글샘 2012-03-21 11:42   좋아요 0 | URL
제 서재의 카테고리에 '마리 여사' 코너가 있습니다.

대단한 책, 강추~
프라하의 소녀시대, 강추~
교양 노트, 읽어볼 만 하실 겁니다. ^^

2012-03-21 11: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12-03-21 11:58   좋아요 0 | URL
사람이란 그렇다
사람은 사람을 쬐어야지만 산다
독거가 어려운 것은 바로 이 때문,
사람이 사람을 쬘 수 없기 때문
그래서 오랫동안 사람을 쬐지 않으면 그 사람의 손등에 검버섯이 핀다 얼굴에 저승꽃이 핀다
인기척 없는 독거
노인의 집
군데군데 습기가 차고 곰팡이가 피었다
씨멘트 마당 갈라진 틈새에 핀 이끼를 노인은 지팡이 끝으로 아무렇게나 긁어보다가 만다
냄새가 난다, 삭아
허름한 대문간에
눈가가 짓물러진 할머니 한 사람 지팡이 내려놓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 바라보고 있다 깊고 먼 눈빛으로 사람을 쬐고 있다(사람을 쬐다, 유홍준, <저녁의 슬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