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 말해줘
버네사 디펜보 지음, 이진 옮김 / 노블마인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내 기억에 따르면 나는 지금까지 서른두 곳을 전전했고 그 모든 집의 공통점은 바로 소음이었다.

밖에서는 버스 소리, 브레이크 소리, 화물열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왔고,

안에서는 여러 대의 텔레비전 소음, 전자레인지나 젖병 데우는 기계의 신호음, 초인종 소리, 욕 소리,

자물쇠 채우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아이들의 소리도 있었다.

아기 우는 소리,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는 형제들이 울부짖는 소리,

너무 차가운 샤워기 물줄기에 지르는 비명, 룸메이트가 악몽을 꾸며 흐느끼는 소리,

그러나 엘리자베스의 집은 달랐다.

황혼의 포도밭처럼 엘리자베스의 집안은 고요했다.

열린 창문으로 가냘프고 높은 윙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그 소리는 전선을 타고 흐르는 전류의 소음 같았지만

나는 그것이 자연의 소리라고 상상했다.

이를테면 폭포 소리라든가 벌떼 소리같은.(56)

 

고아 소녀 빅토리아는 거친 성격으로 입양을 거절당하다가

포도밭을 하는 엘리자베스와 만나게 된다.

 

빅토리아는 꽃에 대하여 비상한 감각을 가지고 있어서,

꽃을 고르는 안목도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된다.

빅토리아는 인간의 언어보다 꽃말로 의사전달을 하려는 방식을 생각해 내지만,

꽃말 사전에 따라서 다르게 풀이되어 있는 해설로 인하여 오해를 사는 일도 생기게 된다.

 

빅토리아가 소리에 대해서 저렇게 민감한 것이,

인간의 언어의 한계를 체득하여 다른 방향으로 안테나를 돌린 이유일는지도 모르겠다.

 

"빅토리아, 꽃말은 타협이 불가능한 거란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모든 꽃은 꼭 한 가지 의미만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야. 로즈메리처럼. 로즈메리의 꽃말은?"

"기억. 셰익스피어가 그랬어요. 그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맞아. 그리고 매발톱 꽃은?"

"버림."

"호랑 가시나무는"

"예지"

"라벤더는?"

"불신."

"매러디스는 왜 네가 학습능력이 없다고 했지?"

"학습 능력이 없으니까요."

 

이렇게 하여 빅토리아의 재능을 발현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엘리자베스와 코드가 맞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빅토리아들은,

이런 질문을,

자신을 알아봐줄 수 있는 질문을 가슴 속에 가진 사람을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채,

독특한 개성의 소유자 내지는 '학습 능력이 없는 존재' 취급을 받으며 외로이 고개 떨구고 살아갈 것이다.

 

나는 도대체 몇 번이나,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엉뚱한 말을 했던 것을까?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112)

 

화성 남자, 금성 여자 이야기도 있고,

개와 고양이의 의사 표현 이야기도 있다.

 

인간은 자기 나름대로의 의사 표현 방식을 나름대로 갖추고 있게 마련인데,

그 번역기가 서로 호환되지 않는다면,

상대방을 오해하거나, 적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도 많이 생길 것이다.

 

이 소설은 소녀 취향의 꽃말 사전을 즐겨 찾던 이들이라면 반갑게 맞을 수 있는 책이다.

그렇지만, 이야기 템포가 빠르지 않고 빅토리아의 내면이 발현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

그걸 기다려주는 참을성 정도는 가지고 읽어줘야 한다.

 

그걸 참지 못한다면 빅토리아한테 꽃 한 송이는 건네 받아야 할 것이다.

 

엉겅퀴 한 송이.

 

인간에 대한 불신, 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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