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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천국 ㅣ 창비시선 318
이영광 지음 / 창비 / 2010년 8월
평점 :
숭고 : 위대한 문학작품의 특징이 되는 고결한 사상·감정·정신을 일컫는 문학 비평 용어.
하나의 느낌이되 일상적인 의미의 느낌을 능가하는 바로 한계에 다다른 주체가 겪는 느낌이다.
(숭고한 봉헌, 장뤼크 낭시)
아픈 천국...
천국은 완전무결한, 천의무봉의 세계는 아니리라.
시인이 '천국'이라고 상정한 곳은,
가장 숭고한 세계다.
시인의 마음 속에 그릴 수 있는 가장 높고, 외롭고, 차가운 곳에 다다른 정신의 경지가 숭고라면,
그 고고함의 극단, 한계에 다다르는 마음을 시로 쓴다면 '숭고미'가 될 것이다.
화자의 마음 속에서 가장 숭고한 순간을 글로 쓴 것으로 보이는 시가 '고사목 지대'다.
나이들어 바싹 말라 벼락맞아 죽은 나무들이 하늘향해 기둥들을 솟구치고 있는 곳에서,
그는 죽어서 다시 죽을 수 없는 존재의 숭고함, 장엄함을 목도한다.
죽은 나무들이 씽씽한 바람소릴 낸다
죽음이란 다시 죽지 않는 것
서서 쓰러진 그 자리에서 새로이
수십 년씩 살아가고 있었다
사라져가고
숨져가며,
나아가고 있었다
有志를 받들 듯,
산나무들이 죽은 나무들을 인정해주고 있었다
정산 부근에서는 생사의 양상이 바뀌어
고사목들의 희고 검은 자태가 대세를 이룬 가운데
슬하엔 키 작은 산 나무들 젖먹이처럼 맻혔으니,
죽은 나무들도 산 나무들을 깊이
인정해주고 있었다
나는 높고 외로운 곳이라면 경배해야 할 뜨거운 이유가 있지만,
구름 낀 생사의 혼합림에는
지워 없앨 경계도 캄캄한 일도양단도 없다
판도는 변해도 생사는
상봉에서도 쉼 없이 상봉중인 것
여기까지가 삶인 것
죽지 않은 몸을 다시 받아서도 더 오를 수없는
이곳너머의 고, 저 영구 동천에 대하여
내가 더 이상 네 숨결을 만져 너를 알 수없는 곳에 대하여
무슨 신앙 무슨 뿌리 깊은 의혹이 있으랴
절벽에서 돌아보면
올라오던 추운 길 어느 결에 다 지우는 눈보라,
굽이치는 능선 너머 숨죽인 세상보다 더 깊은 신비가 있으랴 (고사목 지대, 전문)
인간과 인간이 부딪는 공간이 늘 지옥이었던지,
시인은 지옥을 벗어나 천국을 상상하며 늘 혼자 있는 행복을 믿었다.
그러나, 행복 속에 지옥은 없었으나, 안녕함 역시 없었다.
그는 행복의 현관문을 열고
다른 문을 열고 들어갈 기회를 엿본다.
천국을 찾는 나그네의 발걸음 같다.
혼자 있는 것이 행복하다고
나는 믿었지만
행복 속에 안녕이 없네
... 혼자 있는 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
한마디도 하지 않는 자
무엇이든 저지르고 마는 자이네
그의 몸은 그의 몸 이기지 못해
일어나지 않는 몸,
기필코 자기를 해치는 몸이네
이 독방에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독방
현관문 열고
방문 열고 들어서면
더 들어갈 데가 없는 곳에,
그러나 더 열고 들어가야 할 문 하나가 어디엔가
반드시 숨어 있을 것 같은 곳에
쓰러지지 않고
침묵하지 않고
기어다니지 않아도 되는
더 단단한 독방 하나, 나는 믿었지만
그 꿈 같은 감옥
불 켜면 빛 속으로 사라지고
지금, 타는 듯한 벌판에서 눈 감는 사람은
또다시 문밖에 누워 잠드는 사람이네 (독방, 부분)
제주도의 비자림을 걷던 추억을 떠올리며,
그 속에 담아 둔 천국을 상상한다.
먼 훗날 당신이 아파지면
우리가 맨발로 걷던
비자림을 생각하겠어요...
나는 당신이, 마음보다 더 깊은
몸속의 어둠 몸속의 늪 몸속의 내실에
날 들여 세워두었다 생각했지요
당신 속에는, 맨발로 함께 거닐어도
나 혼자만 들어가본 곳이 있지요
나 혼자선 나올 수 없는 곳이 있지요
먼 훗날 당신이 아파지면
웃다간 눈물 나던 비자림을 찾겠어요(기우)
천국에서 가장 무서운 일은
사람을 잃는 일인 모양이다.
그리고 만날 수 없는 사람을 생각하면 시인은 그늘이 된다.
외롭게 쓰러져있는 그늘 속의 탬버린.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사라져버릴 것 같은 사람
사라졌는데도
사라져버릴 것 같은 사람(그늘 속의 탬버린, 부분)
그리하여 그 사람을
그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은 지옥이 되리라.
불타는 무간 지옥으로 들어갈 육신을 안고,
사랑하는 이에게 '미안'이라고 말하는 것이리라.
사랑하는 이에게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Love means never having to say you're sorry.를 떠올렸으리라.
미안할 일을 해선 안 되는 것이 사랑이지만,
이미 벌어진 일, 사랑을 앞에 두고, 시인은 쓴다.
사랑의 미안...이라고...
울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불이 들어가서 태우는 몸.
네 사랑이 너를 탈출하지 못하는 첨단의 눈시울이
돌연 젖는다 나는 벽처럼 어두워져
아, 불은 저렇게 우는구나, 생각한다.
따로 앉은 사랑 앞에서 죄인을 면할 길이 있으랴만,
얼굴을 감싸쥔 몸은 기실 순결하고 드높은 영혼의 성채
울어야 할 때 울고 타야할 때 타는 떳떳한 파산
나는 불속으로 걸어들어갈 수 없다.
사랑이 아니므로, 함께 벌받을 자격이 없다.
원인이기는 하나 해결을 모르는 불구로서
그 진흙 몸의 충혈 껴안지 못했던 것.
네 울음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나는
소용돌이치는 불길에 몸 적실 의향이 있지만
그것은 모독, 모독이 아니라 해도, 이 어지러움으론
그 무엇도 진화하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나는
사랑보다 더 깊고 무서운 짐승이 올라오기 전에
피신할 것이다 아니, 피신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제자리에 가만히 멈춰있을 것이다.
네가 단풍처럼 기차에 실려 떠나는 동안 연착하듯
짧아진 가을이 올해는 조금 더디게 지나는 것일 뿐이리라.
첫눈이 최선을 다해 당겨서 오는 강원도 하늘 아래
새로 난 빙판길을 골똘히 깡충거리며,
점점 짙어가는 눈발 속에 불길은 서서히 냉장되는 것이리라.
만병의 근원이고 만병의 약인 시간의 찬 손만이 오래
만져주고 갔음을 네가 기억해낼 때까지,
한 불구자를 시간 속에서 다 눌러죽일 때까지
나는 한사코 선량해질 것이다.
너는 한사코 평온해져야 한다.(사랑의 미안,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