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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 위에서 떨다 ㅣ 창비시선 226
이영광 지음 / 창비 / 2003년 8월
평점 :
이영광의 시에서 '직선'과 '두려움'을 만났다.
삶이 온갖 우연성들의 산만한 합집합처럼 보일 때도 있어
무의미한 일들이 날마다 쌓이고 쌓일 따름으로 느껴지는 날도 있지만,
어떤 날인가에는
수정할 수 없는 직선으로
외나무다리에서 부들부들 떨면서 만나야 하는
벼랑 끝처럼 단호하게 느껴지는 날도 있게 마련이다.
그런 날에 대한 시다.
고운사 가는 길
산철죽 만발한 벼랑 끝을
외나무다리 하나 건너간다
수정할 수 없는
직선이다
너무 단호하여 나를 꿰뚫었던 길
이 먼 곳까지
꼿꼿이 물러나와
물 불어 계곡 험한 날
더 먼 곳으로 사람을 건네주고 있다
잡목 숲에 긁힌 한 인생을
엎드려 받아주고 있다
문득, 발 밑의 격랑을 보면
두려움 없는 삶도
스스로 떨지않는 직선도 없었던 것 같다
오늘 아침에도 누군가 이 길을
부들부들 떨면서 지나갔던 거다.(직선 위에서 떨다, 전문)
그래, 두려움 없는 삶도,
스스로 떨지 않는 삶도... 없다는 것을,
누군가도
오늘 아침
이 길을 부들부들 떨면서 지나갔던 것을
그 직선을 만날 수밖에 없음을 생각했던 것은 시인만은 아니리라.
그래서 그는 벼랑에 얼어붙은 폭포를 보면서,
흘려보낸 물살들은
멀리 가서 함부로 썩어버리고
아무 것도 기르지 못함을...
그런 삶을 함부로 살아왔음을 반성하기도 한다.
그런 눈으로 보면,
빙폭 한 점에서도
침묵하고 거꾸로 벌받는 몸이 되어 매달려 선
프로메테우스를 만나게도 되는 법이다.
서 있는 물
물 아닌 물
매달려
거꾸로 벌받는 물,
무슨 죄를 지으면
저렇게 투명한 알몸으로 서는가
출렁이던 푸른 살이
침묵의 흰 뼈가 되었으므로
폭포는 세상에 나가지 않는다
흘려 보낸 물살들이 멀리 함부로 썩어
아무 것도 기르지 못하는 걸 폭포는 안다 (빙폭 1, 전문)
그의 꼿꼿한 정신은
개개 풀린 나날의 삶을 흐리멍텅한 눈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어느 날 갑자기 목에 칵,
하고 걸린 한 점의 호흡처럼,
그의 정신은 순간순간의 부끄러움을 문자로 '빙폭화' 하는 것이다.
가시처럼 목에 걸린
한 점의 호흡이
물을 문득,
돌로 부풀린다(빙폭 2, 부분)
이 시집에서 시인은 먼 길을 걸어 돌아온 지점에 서 있는 듯하다.
그래서 먼 길이 함축한 먼지 바람을 무연히 회고하면,
문득,
열대처럼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그런 것이 '마루 밑 열대'에서 화들짝 펼쳐진다.
세월에 손을 댄다 뜯어낸 마루 아래가 금방 희게 바랜다 빛의 무덤 속, 바람이 깁고 지나 뒤란까지 길 나있다 ...
사람이 버린 것만이 이렇게 온전하여 마루 위 식솔들 공기알처럼 흩어질 때 눈먼 바람 눈먼 세월을 허락해 일가를 이루었다 겨울밤의 놋요강은 여전 지리고 귀 떨어진 무쇠 화로가 화끈하다 푸르러 산으로 돌아가는 개간밭들 건너다볼 때 떨손 대지 마, 쥐어박듯이 불인두 하나 눈시울을 눌러온다 마루 밑에 열대가 있다 (마루 밑 열대, 부분)
이영광의 시집에서
흩어져있던 삶들이 주섬주섬 모인 이삿짐처럼 초라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글을 읽는 일은
재미보다는 삶에 대한 부끄러움을 환기한다.
그의 시들이 죽음을 더듬는 것들도 흥미롭다.
삶에 대한 강한 긍정들은,
죽음에 접촉하는 점접들조차 능수능란하게 말로 펼치고 있는 듯 하여 재미있다.
먼 곳의 조사에 다녀왔다....
잊혀진다는 것은 나의 공포였으나
아무도 없는 곳이 이렇게 아늑할 줄이야
결국 혼자가 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인가
이곳이 대체 어딘가 또 문을 열어 놓았던가...
이 세상에 내 것이란 애당초 없었다는 것
그렇지, 동의하듯 다시 날리는 눈발...
깜박, 불이 꺼지듯 나는 깨달았다.
나는 다만 오래 나를 떠돌았을 뿐
세상의 둥근 의자에 앉아 있으면 자객처럼
어디엔가 완전히 묻혀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고
나의 생에 발 씻고 간 자들이 눈앞을 지나간다
바깥의 어둠, 천천히 걸어 안으로 들어온다 (앉아서 말하다, 부분)
삶 자체가 하나의 '영광'스러운 일이어야 하는가?
무연히 풀어헤쳐진 연기처럼 바람처럼
가벼운 것이어야 하는가...
등불 하나처럼 존재를 환히 밝히는 것처럼 여겨지는 영광스런 날도 있게 마련이고,
자객처럼 존재 자체가 무화되어버리는 날도 있게 마련인 법.
바깥의 어둠이
천천히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곧 사는 일이고
곧 죽는 일이라고
그는 '앉아서' 조용히 말한다.
그는 나보다 한 살 아래인데,
그는 나보다 백 살은 나이들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