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리라이팅 클래식 15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예전의 명의는 '척 보고' 아는 의원이었다.

얼굴빛만 보고도 '간이 나쁘구만.'하거나, 몇 마디 나눠보고는 '색을 밝히는 놈이구만.' 이러고...

맥을 짚어보고 '셋째가 들어섰어.'라거나, 배를 눌러 보고, '큰 병원 가봐, 오래 못 살겠어.' 이러는 의원을 명의로 쳤다.

병을 제대로 아는 것이 바른 치료의 시작이라고 했으니,

이런 여러 가지 진료의 방법으로 병증을 알아내는 것이 의사의 기본이었겠는데,

글쎄, 그것이 요즘엔 전문대 졸업한 방사선 기사에 의해서 결과가 판독되는 시대가 오고 말았다.

 

수십 만원을 내고 큰 자기공명통 안에서 고뇌의 무도를 겪고 나면,

고귀하신 원장님께로 인도된 환자는 컴퓨터 화면 앞의 자기 신체를 바라보게 된다.

물론, 이렇게 기계화된 결과 오진의 확률이 급격히 낮아졌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 값비싼 기계들을 운영하기 위하여 또한 '불필요한 진료'의 확률은 급격히 높아졌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자본의 시대엔 질병조차 자본의 관리를 받는 셈인데...

 

바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집'이다.

일단 '두 집'이 있어야 이어진 바둑돌들은 살아있는 게 되는데,

그 '집'을 갖추기 전까지는 '미생'이라고 해서, '아직 살아있는 게 아닌' 상태를 유지한다.

이 '미생'의 상태에서는 아무리 대마라고 하여도 한 순간에 위기를 맞게 되는 법이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 역시 '집'이다.

일단 마음 속에 튼튼한 집이 있어야 집에서 나고 드는 사람들은 살아있다는 존재감에 싸여 살게 되는데,

그 '집'이 허약해진 상태, 어쩌면 '빈집'을 드나드는 것처럼 살아 간다면,

'함께 살아도 사는 게 아닌' 가정인 상태를 유지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미생'의 상태에서 아무리 부유한 집안도 한 순간에 위기를 맞게 되는 일은 당연지사.

 

편작의 큰형은 미병의 상태에서 예방을 했고, 작은형은 병이 약할 때 치료했으나, 편작은 죽을병을 낫게 하여 명의로 유명해 졌다고 한다. 편작네 집안에서 편작은 가장 하수로 여겨졌다고 하니...

 

바둑의 묘미는 대마를 잡기 위하여 '패'를 활용하기도 하고,

'자충수'를 두기도 하는 등, 꾀를 부리지만,

튼튼한 집이 있다면 어떤 고수 앞에서도 흔들릴 염려없이 살아있는 말이 되고,

집도 없이 떠돌다가 '축'으로 몰려 자폐적 행보를 보이는 자는 영락없이 자멸하는 말이 되고 만다.

 

의학의 백미는 뭐니뭐니해도 예방에 있고,

그 예방을 위하여 '자기 몸의 연구자'가 스스로 되도록 이끌어주는 책인 '동의보감'의 의미는 자못 크다고 하겠다.

허준은 '스스로 자기 병을 알아 스스로 치유해 가라'고 하고,

이제마는 '널리 의학을 밝혀 집집마다 의학을 알고 사람마다 병을 알게 된 연후라야' 장수한다고 하였다.

결국 가장 큰 의사는 '자신'이 관심을 가지는 것이라는 게 결론이다.

 

동양의 의학은 서구의 해부학이나 이원론적 생리학과는 자못 다른 점이 많은데,

보이고, 존재하는 해부학적 지식을 뛰어넘어 '비유적이고 철학적인' 장부의 작용이 '태극'처럼 상생하고 상극하면서 상호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복잡하면서도 미묘한 해석의 어려움을 보여주며,

이것 아니면 저것 식의 길항작용뿐만 아닌,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기운의 흐름을 다루는 점에서 존재를 상정하는 매트릭스가 다른 곳임을 배우게 된다.

어느 것이 낫다는 것을 말할 수는 없지만, 서구의 의학과 차이점을 음미할 필요는 충분히 있어 보인다.

 

동양 사상은 우주와 생명을 어떤 실체들의 종합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흐름이자 운동으로 본다.(125)

따라서 삶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동사는 운동성이 존재를 규정한다.

그때 운동은 이동, 중첩, 변이가 핵심이다.

정기신, 음양오행, 이 개념들 역시 명사가 아니라 동명사에 가깝다.

그것을 절단, 채취하는 순간 명사화된다.

명사가 아닌 동사적 흐름을 사유하는 건 일단은 쉽다. 하지만 미끄럽다.

잡았는가 싶으면 슬그머니 손을 빠져나간다.

 

고미숙의 설명 역시 쉽지만은 않다.

그렇지만 고미숙이 위치한 유리한 자리는,

고미숙이 쓴 책이 아니었다면, 내가 이런 책을 들춰볼 용기를 얻기 어려웠을 것이란 지점이기도 할 것이다.

 

자본의 세상은 인간을 단절화, 단편화시킨다.

돈벌러 간 남편은 '빈집'을 두려워하면서 외도를 하고,

공부하러 간 아이는 '빈집'을 두려워하면서 학원을 전전하고,

그 '빈집'을 지키는 아내는 다시 온갖 중독에 침윤하고 마는 악순환.

 

공감과 비움,천지만물과 공명하기 혹은 절대적 영토 벗어나기,

이런 용어들이 뒤섞여 나오지만, 결국 목표치는 같다.

'빈집'을 튼튼하게 꾸리고, '빈몸'을 유기적으로 활발발한 개체로 되살리라는 것.

 

불통의 경지를, 진액이 막히면 담음이 된다... 뭐, 이런 말을 쓴다.

통즉불통, 불통즉통, 통하면 아프지 않고, 통하지 않으면 아프게 된다.

현대인의 '뒷담화'라든가, 화병으로 치닫는 조급증, 속도 경쟁은 인간을 질병의 복합체로 만들게 되는 바,

'의학 내부의 전통'과 '자연 철학적 논리'의 대립에서 선택하여야 하는 지점이 있다면,

늘 후자를 택했다는 동의보감의 저술 원리를 생각해 보면,

'의학을 위한 의학'을 뛰어넘어 '인간을 위한 의학'을 지향했던 현인들의 사랑이 돋보이기도 한다.

 

선조가 허준에게 '우리나라에서는 약재가 많이 산출되지만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니

종류별로 나누고 우리나라에서 부르는 명칭을 백성들이 쉽게 알수 있도록 하라.'는 선조의 교지가 있다는데,

뭐, 어느 기관에서 발간되는 자료든, 맨 앞의 발간사야 기관장 명의로 기록되기 마련인 법이니 무시하고,

'신토불이'의 '동의'라는 '귀한' '책'으로서의 동의보감을 읽는 사람 옆에서 이야기 듣는 것만으로도 뿌듯한 노릇이다.

 

수승화강이라고,

음의 기운은 오르게, 양의 기운은 내리가 하는 것이 원리라는데,

요즘엔 하체가 가느댕댕하게 스키니진을 입는 것이 유행이라 하니,

음허화동, 음이 비어서 화가 동하는... 감정과 정욕이 한없이 항진하는 세상이 되기도 한다는 해석도 들어둘 법 하다.

 

존재와 병은 분리될 수 없다.

죽은 존재에게는 아무런 병도 없는 법이다.

인간은 '순음지체'이거나 '순양지체'일 수 없다고 한다.

'음양화평지체'를 추구하는 동의학에서 '질병' 역시 '인간의 존재'와 물질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대단히 복잡한 유기적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셈이다.

 

한미 FTA로 한국의 의료 서비스가 민영화 내지는 국민건강보험의 파산을 예고하기도 하는 걱정들도 있다.

유기적 관계가 깨어진 사회는,

그리하여 서로 통하지 않고 불신과 괴담만이 난무하는 사회는,

결국 '질병의 도가니'로 그 구성원을 몰아넣을 것은 아닌지 두려울 따름이다.

 

이 책에서 고미숙은 '동의보감'을 통하여 '삶의 비전'을 보자고 한다.

이 책이 부족한 점이라면, '낱낱의 전문 용어들에 대한 쉬운 설명'이다.

그렇지만 이 책의 장점이라면, 풍부한 철학적 해석과 비유를 통하여 낯선 개념이 곧장 이해되도록 하는 부분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 책의 상세 부분이 옳고 그름이야 전문가들이 판단할 영역이지만,

결국 삶이란,

바둑 한 판 두는 일처럼,

한 치 앞을 보기 힘든 '패' 싸움이 아니라,

'든든한 집'을 중심으로 살아나가는 요령을 깨우치는 일이란 생각이 든다.

'미생'의 '대마'는 한 순간 위기에 처할 수 있음을, 의학을 통해서도 배울 수 있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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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연금, 보험, 저축을 능가하는 노후대비'책'
    from 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2012-11-01 18:16 
    '두통에는 진통제', '우울증엔 항우울제', '불면증엔 수면제'라는 것이 공식처럼 각인되고 있다. 그러나 시댁과 갈등을 겪는 전업주부의 두통과 학습우울증에 걸린 청소년의 두통이 과연 같은 질병일까. 또 시댁과 갈등을 겪는 주부에게 어깨 결림, 두통, 불면증, 소화불량, 생리통이 동시에 나타났다면, 이는 각각 정형외과, 신경과, 정신과, 내과, 산부인과에서 따로 해결해야 할 병일까. ─강용혁, 『닥터K의 마음문제 상담소』, 12쪽 예전에 손발이 너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