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ㅣ 문학동네 시인선 15
장석남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청복이란 말이 있다.
맑을 청에 복 복. 淸福.
재물이나 부귀영화로 인한 세속의 복을 '열복 熱福'이라고 하는 반면,
부귀영화의 끄달림에서 벗어난 조금 외롭지만 높고 쓸쓸한 서늘함에서 느껴지는 복이 청복이다.
장석남의 마음 나비가 이즈음 청복에 붙어 앉은 느낌이다.
오늘 나는 가난해야겠다
그러나 가난이 어디 있기나 한가
그저 황혼의 전봇대 그림자가 길고 길 뿐
사납던 이웃집 개도 오늘 하루는 얌전했을 뿐
... 거짓마저도 용서할
맑고 호젓한 가계
오늘도 드물고 드문 가난을 모신,
때 까만 메밀껍질 베개의
서걱임
壽와 福의
서걱임(가난을 모시고)
가난함의 남루를,
때 까만 메밀껍질 베개로 형상화하였는데,
그 베개의 서걱임이라...
때 낀 베개의 수와 복, 그 가 닿을 수 없는 바람의 한끝에서 서걱이는 촉감과 소리가 마음에 남는다.
좋은 시는 오래 마음에 남는 영상과 청각 영상으로 느낄 수 있다.
좋은 사람이 오래 마음에 따스한 자국으로 남아 있듯이.
날이 맑다
어떤 맑음은
비참을 낳는다
나의 비참은
방을 깨놓고 그 참담을 바라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광경이, 무엇인가에 비유되려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몰려온 것이다
너무 많은 얼굴과 너무 많은 청춘과 너무 많은 정치와 너무 많은 거리가 폭우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밝게 밝게 나의 모습이, 속물근성이, 흙탕물이 맑은 골짜기를 쏟아져 나오듯
그러고도
나의 비참은 또 지하 방을 수리하기 위해 벽을 부수고 썩은 바닥을 깨쳐 들추고 터진 하수도와 막창처럼 드러난 보일러 비닐 엑셀선의 광경과 유래를 알 수 없는 얼굴들과 악취들이 아니고
함마를 잠시 놓고 앉은 아득한 순간 찾아 왔던 것이다
그 참담이 한꺼번에 고요히 낡은 깨달음의 話頭가 되려 한다는 사랑도, 꿈도, 섹스도, 온갖 소문과 모함과 죽음, 저주까지도 너무 쉽게, 무엇보다 나의 거창한 無知까지도 너무 쉽게 깨달음이 되려 한다는 것이다 나의 비참은
나의 두다리는 아프고
어깨는 무너진다
방바닥을 깨고 모든
堅固를 깨야 한다는 예술 수업의 이론이 이미 낡았다는
시간의 황홀을 맛보는
비참이 있었다
아직도 먼 봄, 이미 아프다
나의 방은 그 봄을 닮았다
나의 비참은 그토록 황홀하다(장석남, 방을 깨다,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중)
먼젓번 시집에서 '방을 깨'어 놓고,
무람히 참담함을 느끼고 앉은 남자를 만났다.
아직도 먼 봄을 이미 아파하는, 비참한 속에서 황홀함을,
비참함이란 무엇인가,
인생이 하나의 비유인 바에야...
이번엔 담장을 두른다.
그리고 금을 긋는다.
그의 방이 내장을 드러내 놓고 파열의 아뜩함에 맞닥뜨렸을 때, 내맘은 불편했으나,
그가 말로 두른 담장에 나는 안도한다.
내 마음이 그런 편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흰 돌멩이 처음 그 자리에 앉던 시간의 문 따고 나오는 눈빛 따스하여 나는 그걸 알뜰히 모아 새 담장을 치려 한다.
문은 새삼 내지 않으려 한다. (담장)
그의 이 글에서 새삼 무문관의 치열함을 얻는 것은 아니나,
다만, 문은 새삼 내지 않으려 한다...는 담담함이,
왜 사냐건, 웃지요...는 비루함보다 마음에 든다는 뜻이다.
그의 담장은 문이 없으나, 닫혀있지만은 않다.
이 무슨 모순된 말이냐고 나무라는 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글을 읽고 나면 이해가 갈 것이다.
단추를 한 다섯 개쯤 열면 돼요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그리고
근심처럼 흐르는 안개를 젖히면 그만이에요...
단추를 한 다섯쯤 풀면
지나던 메아리가 멈춘 듯
어디서 왔는지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그 호수를 찾는 일이 (호수, 부분)
안갯속 호수를 찾아 나서는 길은, 생의 근원을 묻는 일이기도 하다.
철학자들이 존재론...처럼 덜떨어진 말로 모질게 잘라낸 강파른 단면으로는 느끼지 못할,
안개와 호수가 서로를 품고 있으면서도,
서로의 존재를 감추어 두듯,
단추는 자신의 존재를 꽁꽁 감출 요량으로 만든 것이지만,
기실 단추를 한 다섯쯤 푸는 것으로 소통의 길을 열어둘 수도 있는 일.
실존의 허접하고 찌질함에 좌절하는 한 사람이 있다면,
그의 이런 시들이 위안이 될 지도 모른다.
내가 얻었던 그런 위안.
안갯속에 숨겨 있어도 될 법하고,
또 한 다섯 쯤, 단추를 풀어 젖혀도 뭐, 누가 나무라랴 싶은... 그런 마음... 아는 이는 알리라.
그가 마음 속, 자신만의 공간을 비집어 내려 애를 쓰는 모습을 보면서,
아~ 삶이란 게, 누구나 이렇게 애써 가득찬 가슴 속 매운 기운을 밀어내면서
혼자 살 수 있을 만한 공간 좀 내어보는 그런 것인지... 생각한다.
조감도를
그린다 눈을 감고
빛이 오는 쪽을 바라보고 그림자를
앉힌다...
비가
온다 빗금으로 오고 김장 청무우가 젖는다
빗물받이 홈통에 한 줌씩 내려앉는
하늘의 기별...
집은 하늘의 귀를 가져서
빗물의 고백을 빠짐없이 듣는다
이슬의 노래를 듣는다
눈보라의 독백은
오래 앉을 자리가 없다는 것!
별과 별자리 움찔움찔 지나간다
그리고
집이 빈다 숨결은
상강 후의 칸나처럼 상부의 붉은 꽃대를 놓는다...
아무 보는 이 없이 피는 꽃이
더 짙은 까닭은
아무 보는 이 없기 때문
아무 보는 이 없기 때문
나는 매운 재로 누워서
눈을 감고 집을 짓는다
그늘 매운 집을 짓는다(물과 빛과 집을 짓는다, 부분)
삶은 매운 재로 살아가다 매운 재로 스러지는 것.
매운 재의 집을 짓는 헛된 몸부림이 실존의 이유인 것.
아, 상강 후의 칸나처럼 상부의 붉은 꽃대를 놓는...
그렇지만 그는 눈물짓지 않는다.
삶의 비애(悲哀)와 비의(秘意)를 생각하면서,
아무 보는 이 없기 때문임을 혼자서 되풀이하며 마음을 한번 더 질끈 동여맨다.
그리고, 당신의 안부를 묻는다.
그대는, 잘 지내고 있는지 말이다.
오도카니 앉아 있습니다
이른 봄빛의 분주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발목이 햇빛 속에 들었습니다
사랑의 근원이 저것이 아닌기 하는 물리(物理)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빛이 그 방에도 들겠는데
가꾸시는 매화 분(盆)은 피었다 졌겠어요
흉내 내어 심은 마당가 홍매나무 아래 앉아 목도리를 여미기도 합니다
꽃봉오리가 날로 번져나오니 이보다 반가운 손님도 드물겠습니다
행사 삼아 돌을 하나 옮겼습니다
돌 아래, 그늘 자리의 섭섭함을 보았고
새로 앉은 자리의 청빈한 배부름을 보아두었습니다
책상머리에서는 글자 대신
손바닥을 폅니다
뒤집어보기도 합니다
마디와 마디들이 이제 제법 고문(古文)입니다
이럴 땐 눈도 좀 감았다 떠야 합니다
이만하면 안부는 괜찮습니다 다만
오도카니 앉아 있기 일쑵니다 (안부,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