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 옆 철학카페
김용규 지음 / 이론과실천 / 2002년 2월
평점 :
절판


철학카페에서 읽기 시리즈의 '문학 읽기'와 '시 읽기'의 감동에 비하자면...

이 책은 참 재미 없는 책이다.

이 책 뒤로 반성을 열심히 하고 ^^ 2006년에 문학읽기를, 2011년에 시읽기를 썼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은...

종이가 컬러 프린트도 없는데도 번들거려서 독서에 완전 방해가 된다.

그리고 종이 질이 좋은 만큼 책이 무거워서, 뒹굴거리면서 읽기가 힘들다.

누워서 읽으면 손목이 아프고...

그렇다고 이 책이 카페에서 정말 카푸치노 한 잔 앞에 놓고 읽어야 할 책은 아닌데 말이다.

 

희망, 행복, 시간, 사랑, 죽음, 성에 관한 담론을 펼치고 소개한다.

 

우선, 희망에 대한 이야기에서 오랜 고민을 다시 만났다.

판도라의 상자 이야기에서, 보통 판도라의 상자 안에 남아있는 '희망'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세상에 온갖 재앙이 퍼져있지만, 아직 희망은 남아있다...는 투의 착각을 하곤 한다.

'희망'을 나오지 못한 '재앙 중 하나'라고 읽어주는 이를 만나지 못해 아쉬웠는데 이번에 김용규의 글에서 의미를 고민하는 일단을 만난 것은 정말 반가운 일이다.

 

그래. '욕망이나 소망'처럼 물질적이거나 속물적인 것은 노력으로 이룰 수 있다.

그렇지만, '희망'처럼 오지 않는 것을 바라는 마음은 '재앙'으로 보아도 될 것인지...

'희망'이라는, '부재로 인한 존재'의 가치를 바라는 인간의 마음을 읽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희망이란 절망적 현실의 산물이다.(20)

어둠이 빛을 만들어낼 수 없듯, 절망이 희망을 만들 수 없는 것.

그래서 희망은 자연스런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에 속한 일이고 의지에 속한 일이다.

인간은 절망의 가장 깊은 곳에서 희망을 길어올리는 존재.

 

역시 철학 카페에서 맛보는 '희망'은 '에스프레소'의 쓰면서 진한 맛, 제대로다.

 

성서 속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면서, 역설적, 고난적, 여정적 상황을 인간의 삶에 내재해있는 보편적 상황으로 일반화한다.  인간의 삶 자체가 기쁨이면서 고통인 역설이고, 고난이고, 그 삶의 여정은 신을 늘 의심하며 살게 한다.

 

그에 대해 '믿음'이란 믿을 만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믿는, 역설적 성격이 '신의 약속'이란다. 재미있다.

 

'잠입자'를 통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는 게 아니라, 오직 사랑하고 믿는 일이다.

믿음이 사랑을 통하여 앎을 전달한다.

곧 믿음이 없으면 내적, 도덕적 상태가 파멸에 이르고,

또한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인생은 아름다워'에서도

불행해지고 불만스러워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즐겁게 해주길 기다리는 왕자처럼 가만히 앉아있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행복해지긴 언제나 어렵다.

분명한 것은 행복해지길 원지 않는다면 행복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우선 자기가 행복해지길 원하고, 이를 만들어 가야 한다는 알랭의 '행복론'을 들이밀면서,

적극적 삶이 행복을 지향하는 조타수가 될 수 있음을 속삭여 준다.

 

인간의 인식이란 세계 자체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에게 유리하도록 파악한 세계, 즉 임의로 만든 한 세계에 대한 재귀적 인식이다.

앎이 곧 삶이요, 삶이 곧 앎인 셈이다.

삶은 그것을 아름답게 파악하고 있는 힘껏 싸워 그렇게 만들어 나가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어디서나 아름답다.

 

이런 이야기를 영화를 통하여 듣는 일도 쉽진 않다.

카뮈에게 '희망'이란 '치명적 회피', '투쟁의 기피', '기권', '철학적 자살'이라는 말로 등치되었다는데,

적극적 삶의 인식, 곧 '기투'에 대한 하이데거의 이야기가 나올 차례다.

 

삶이란 부조리를 버티는 유일한 길은,

사막(부조리)에서 벗어나지 않은채, 그 속에서 버티는 것이란다.

곧 희망을 갖지 않는 법을 배우고,

구원을 호소함없이 살고,

쓰라리고도 멋진 내기를 지탱하는 것이 '기투'다.

 

사람은 부정 속에서는 살 수 없다.

그 부정을 부정함으로써 긍정에 이르고자 하는 용기.

실존이란 무의미에 의미를 주는 행위. 곧 앙가주망의 등장을 예고한다.

 

그러나 존재 자체의 기쁨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 인간의 '욕망'인 바,

탐, 진, 치를 상징하는 저팔계, 사오정, 손오공의 '원을 그리며 도는 자기 파괴적 무한 욕망'을 돌아보게 한다.

八戒처럼 탐욕을 원할 때, <계율>이 필요하고,

悟靜처럼 성냄이 생길 때, <참선>이 필요하고,

悟空처럼 무지가 판칠 때, <지혜>가 필요하다.

그래서 경, 률, 론의 <삼장>을 주워온 것이 '서유기'란 이야기에 등장하듯,

욕망은 언제나 정신적 공복 상태에서 오는 것.

 

'매그놀리아'란 영화에서는 '우연'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인생은 결국 우연히 일어나는 일들의 <마주침>에 대한 현상들이고, <확률>게임에 불과할 따름인 바,

날씨 환경이 수시로 변화하듯, 삶의 궤적들도 수시로 멀어지고 가까워짐을 경험한다.

 

가장 힘든 것은 사람이 사람으로 산다는 것.

 

이 한 마디로 축약하듯,

사람은 시간성을 인식하고,

자신의 찌질함도 인식하지만,

우연의 마주침, 그 우발성 contingency에 대하여 어찌하여볼 수도 없는 존재라는 것.

철학 따위가 아무리 필연성 necessity 을 운운하여도, 그 삶이라는 사태는 어쩔 수 없는 것.

 

이런 고뇌를 보여준다.

결국 이야기는 <죽음>으로 번지게 되어있는데,

'나라야마 부시코'의 오린에게 죽음은

우연히 외부로부터 오는 모든 가능성의 종말이 아니다.

그것은 그녀의 삶 안에 언제나 있었으며,

매 순간마다 그녀의 모든 행위를 결정하는 요소라고 한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객관적 시간으로는 끝나지 않는 현존재의 기획 투사 Entwurf'라고 보는 것.

그래서 죽음에 대한 사고 역시 삶 전체의 유의미성이며, 고유하고, 뚜렷하게 높여진, 곧 인간에의 길로서의 죽음을 이야기한다.

 

철학적인 시, 장석남의 '번짐'을 읽고 싶다.

 

수묵(水墨) 정원 9 - 번짐

                                          장석남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번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채 번져서

봄 나비 한마리 날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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