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이는 서고 싶다 창비시선 209
박영희 지음 / 창비 / 200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팽이는 맞아야 선다.
종아리에 시퍼렇게 쑥물이 들도록 맞아가면서 팽이는 비로소 삶의 동력을 얻고 바로 선다. 

옳게 한번 서보기 위해
아랫도리에 핏물이 든다 

채찍을 피하지 않는 저 당당함!
줄에 목을 매고도 포기 않는 저 뜨거움! 

일어서고 싶거든
한번 사무쳐 보라
바람같은 원한이어도 좋다
팽이는 서고 싶은 것이다
어떠한 빙판 위에서라도
중심을 잃고 싶지 않은 것이다 (팽이, 전문) 

그는 이렇게 노력하며 살아왔지만,
기실 그의 삶은 국가보안법의 그늘에서 쑥물든 것이었다. 

일제치하 광부징용사를 쓰기 위해 월북을 감행, 그 대가로 7년의 감옥살이를 한다.
이 시집의 언어들은 그 옥살이를 바탕으로 해야 이해할 수 있다. 

팽이처럼 바로 서고 싶고, 손으로 발로 뛰면서 글을 써내고자 했던 작가 의식은 이념의 진흙탕에서 붉게 매도되고 말았다. 

입 닫고
귀 열어라 

어떤 노래가 들려오는가
누구의 말이 못이 되어 박히는가 

계곡은
함부로 물을 흘려보내지 않는다 

두 개의 눈은 빛나지 않아도 좋다
시력을 잃어도 좋다 

손이 말하게 하라
발이 말하게 하라 (나의 잠언, 전문) 

그 대신 옥바라지하며 고생했을 아내를 생각하면 그는 눈물을 감추지 못한다.
이렇게 이데올로기와 억압은 인간의 존엄성을 일거에 무너뜨려 버린다.
촛불 집회 나간 유모차 엄마에게 벌금을 매기는 일도 마찬가지다. 

아내 생각하자니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산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남자도 때로는 눈물로 아내의 슬픔을 빠는 것이다
이처럼 아내는 오직 나 하나만을 위해
동굴처럼 웅크리고 산 것을
그 시간 나는 어디에 있었던가
반성하는 마음으로 나 오늘 아침에
피죤 두 방울 떨어뜨렸다
그렇게라도 향기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내의 브래지어, 부분) 

아내의 브래지어를 빨면서, 미안함과 왜 자신이 미안하게 동굴 속에서 살았던가를 혼란스러워 할 수밖에...
피죤 두 방울의 반성,  눈물 두 방울의 두려움... 

나이 서른에 관절을 앓기 시작한다...
내 나이 서른 몇은 고사하고
다들 무릎 꿇고 기도할 때
그 무릎마저 낮출 수 없음이
마치 무슨 죄라도 짓는 기분이다 (관절, 부분)

감옥살이, 빨갱이 삶의 흔적은 관절에 남았는데,
그 기억은 마치 녹찻잎이 꿈틀꿈틀 되살아나듯 살아오른다. 

꿈틀꿈틀,
찻잔 속의 누에들 천지다
짓눌린 몸 일으켜 세우느라 아우성이다 

참으로 삽시에
잊고 산 기억들 파릇파릇 눈을 뜨고
겨우 바닥을 채웠던 마른 잎들
다시금 되살아 나고
어찌 기다림의 아픔 없이 목을 축이랴
어찌 목 잘리는 희생 없이 향기 있으랴 (녹차를 마시며, 부분) 

이렇게 힘겹게 감옥에서 싸우고 있는데,
노무현 정부의 열린우리당 국회의원도 1/3만 국보법 폐지에 찬성하고 나머지는 점진적 폐지나 폐지 반대론자였다는 정봉주 전 의원 소리를 들으면 혈압이 빠각 오른다.
씨바, 그 새끼들은 국민의 대표가 아니야.
수천 명이 그 추운 겨울에 단식 투쟁을 하고 있는데...
그래서 지금 다시 한미 FTA를 찬성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커피를 타오고
팔팔 딜럭스를 내밀며
한장만 쓰랍니다
산다는 건 어차피 사고 파는 장사,
요구 사항을 제시해 보랍니다
그까짓 사상도 따지고 보면
계집의 하룻밤 품 같은 것
원한다면 사나흘 귀휴도 좋답니다
눈 딱 감고 한장만 쓰면 까짓것
밖에 나가 오입도 시켜줄 수 있답니다... (전향서, 부분)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데,
그 감옥 살이는 또 육신이 슬퍼하여 이런 시를 낳는다. 치욕의 역사... 

단 하루라도 좋으니
따뜻한 방에서 한숨 푹 자봤으면
탄불 지핀 아랫목에서 삼십분만 누워봤으면
욕탕에 들어가 언 몸 한번 담가봤으면
단 하루라도 좋으니
흠뻑 비에 젖어봤으면
밤길 한번 거닐어봤으면... (단 하루라도 좋으니 - 갇힌 자의 노래 3, 부분) 

그리고 또 꿈꾼다. 

출소하면 말예요
술도 안 마시고
밥도 안 먹고
연애도 안할 거예요 

哭星場에 가
고무신부터 한켤레 살 거예요 

그 고무신 다 닳도록
미친 듯 걸을 거예요 

비오면 비를 맞으며
눈내리면 눈을 맞으며 

혼자도 좋고 둘도 좋고
걸을 거예요 

밤이 찾아오면
하얗게 새벽이 밝아오도록
집시처럼,
집시처럼 걸을 거예요. (출소를 꿈꾸며 - 갇힌 자의 노래 4, 전문)

그래, 박영희는 걷는 사람이다.
세상 어디든 가서 살펴 보아야 한다고 여기는 것일까.
그 때문에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만주까지 가서 글 쓸 자료를 찾으라
두만강을 건넌 죄로
1992년 1월 국가보안법에 걸려 98년 815 특사로 풀려나기까지 무려 6년 반을 옥살이 했다.
죄목이 잠입탈출이었다. (이하석의 해설 중)

잠입탈출...
그래서 박영희는 아직도 걷고 있다.
길에서,
길을 걷는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 모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