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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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땅, 검은 땅, 흑산에서 희망을 깨달아 자산(현산)으로 명명하기까지...
그곳에도 삶은 이어져 가기에 정약전은 현산어보를 저술한다. 

이 책의 주요 스토리는 배반의 땅에서 태어난 민중들이 구원의 삶을 얻기 위해 무릎꿇지 않고 꼿꼿하게 죽어가는
이 땅의 순교 역사가 몇몇의 인물들과 엮여져 간다.
그 와중에 정씨 삼 형제도 수난을 겪는데 맏이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를 가고,
둘째 정약종은 순교의 길을 택한다.
막내 정약용의 흔적은 지금도 남아 학문의 요체를 느끼게 하는데,
정약용의 배교와 삶으로 가는 길을 건조하기 그지없는 문체로 담담하게 서술하는 김훈은 참 버석거릴 정도로 냉정하다. 

   
 

무너져야 할 것이 무너지지 않는 것은 이 세상의 가장 큰 무서움이었다.
썩은 것들이 오히려 강력하고 완강했다.
황사영은 그 완강함이 무서웠다.(256) 

 
   

세상은 늘 똑같다. 혁명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세상의 무너져야 할 것들은 완고하다.
썩은 것들의 힘은 강력하다. 그것이 무섭다. 

김훈은 썩은 것들을 썩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뿐이다. 건조하고 메마른 목소리로... 

   
 

숯가마 아궁이에서 사위면서 헐떡거리던 잉걸불과 마른 장작의 향기,
발정해서 싸질러 다니다가 며칠 만에 돌아와서 우물가에서 물을 먹던 수캐의 비린내,
청포묵을 쑤는 냄새,
햇볕 쪼이는 여름날의 마을 흙담 냄새가 형틀에 묶인 젊은 숯쟁이의 기억에 어른거렸다.
살점이 흩어진 자리에서, 흘러내린 피의 냄새 속에서 기억 속의 마을의 냄새가 살아났다.
냄새가 어째서 물건처럼 기억되는 것인지,
지나간 냄새가 피 냄새를 밀어내며 콧구멍 속을 흘러들어왔다.(77) 

 
   

두뇌 피질에 오래 기억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냄새의 흔적.
그러나 인간은 상당히 오랜 시간을 향기 또는 냄새의 기억을 간직한다.
그 냄새는 향기에서 비린내, 악취까지 다양하지만,
그 냄새가 불현듯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는 경우도 흔하다. 

시대에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일은 쉽지 않다.
자신의 놓인 자리에 따라 옳은 것도 옳다고 하지 못할 수 있고, 그른 것을 그르다 하지 못할 수도 있다. 
김훈은 메마른 목소리로 뇌까린다. 

   
 

문풍세는 옥섬의 죄인들이 모두 무죄임을 알고 있었다.
너는 무죄다, 라고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사람은 본래 무죄인 것이엇다.
그 무죄한 자들을 데려오는 길은 멀고 또 멀어서 아무도 갈 수 없는 바다를 건너가는,
먼 길을 가는 자의 소임일 것이라고 문풍세는 생각하고 있었다.
먼 길을 가는 자의 소행의 정당성 여부를 먼 길을 가지 못하고 주저않아 있는 자들이 물을 수 없을 것이었다.(274) 

 
   

어둠의 시대,
과연 죄인의 무죄를 믿는 자들과,
죄인의 죄질을 묻는 자들은 어떻게 다른가. 

어둠에 빛이 비치면, 흑산도가 현산도로 변신할 수 있듯,
어두운 시대에 빛이 비치어 희망의 상자에 손을 얹고 기다릴 수 있을 것인가. 

담담한 어조로 김훈은 묻는다.
인간은 과연 얼마나 이성적인 존재인가를...
원형이정의 천도에 대하여 인의예지인 인간의 도리는 과연 얼마나 지켜질 수 있는 것인지를...

----------- 잘못된 표기 하나

97. 기선을 氣船으로 썼는데, 汽船처럼 쓰는 게 옳다. 외륜기선(外輪汽船)을 주로 기선이라 하는데, 흘수가 얕은 배의 밖에 물레방아같은 바퀴가 달린 배를 일컫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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