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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ㅣ 창비시선 334
이장욱 지음 / 창비 / 2011년 8월
평점 :
드라이한 맛.
맥주에도 드라이가 붙고, 포도주에도 드라이가 붙는다.
쿨한 성격과도 상통하고, 끈적거리거나 잡스런 맛이 없는
담백하면서도 왠지 씁쓰레한 맛을 입안 가득 머금은 맛이다.
이 시집은 달착지근 혓바닥에 감칠맛으로 감겨드는 시들로 묶이지 않았다.
드라이한, 그래서 뻣뻣하고 카랑카랑한 시들이 '저만치'서 나를 바라본다.
내가 시를 읽는다는 것은,
내가 시를 읽기 전에, 이미 시인이 내게 시어를 던졌음인데,
그런 거리감이 뚝, 뚝, 시집에서 느껴진다.
이 사람은 어디서 태어났다. 정가과 정각 사이에서, 공과금 고지서와 함께.
누군가 이 남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으로 이루어져있다.
목젖이나 귀청같은 것, 부르르 떠는 것, 그것만으로 이 남자를 판단한다면,
모든 것이 진짜다....
한 남자가 당신에게 나타나고, 한 남자가 당신에게서 사라지고,
내일의 위치가 바뀌었다.
당신은 지금 막,
당신을 지나간 한 남자의 특성을 이해하였다.(특성 없는 남자)
* 특성 없는 남자 : 로베르트 무질
태어남은 생명체의 신비로움이 시작되는 것 같지만,
태어남의 순간부터 인간 존재는 비교되고 성장과 정체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태어남은 곧 특성 없는 남자를 발견하게 되는 것과 모순만은 아닌 것이다.
태어남은 곧 특성 없는 남자 되기, 이며, 특성 없는 남자 보기, 이다.
저 바다 너머에서 해일이 마을을 덮쳤다. 바로 그 순간 생일이 찾아오고, 죽어가는 노인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연인들은 처음으로 입을 맞추고,
케이크를 자르듯이 수평선을 잘랐다. 자동차의 절반이 절벽 밖으로 빠져나온 채 바퀴가 헛돌았다. (생년월일, 부분)
당신이 입을 벌리는 순간
생일에 대한 이야기가 솟아난다
그 다음엔 언제나 불안에 대한 이야기
당신은 곰곰 생각하고 생각한 후 간신히
생일 다음에 오는 불안에 대해
긴 이야기를 시작한다(당신이 말하는 순서)
생년월일은 곧 생일인데, 죽음의 순간,
해일이 덮치는 순간과 생일을 마주 댄다.
죽어가는 노인과 연인들의 키스.
생일 케이크를 자르는 축하와
해일의 수평선 가르기.
자동차의 파손과 헛도는 바퀴.
삶에 대한 에둘러 말하는 비유치고는 처절하다.
그러니 '생일' 다음에 놓이는 지점은 늘 '불안'한 인생인 것.
그의 드라이함의 절정은,
곧 삶과 죽음을 시크하게 냉소적으로 쿨하게 바라보게 되는 지점은,
바로 동사무소다.
출생 신고와 사망 신고가 동시에 일어나는 곳. 동사무소.
동사무소에서 우리는 전생이 궁금해지고
동사무소에서 우리는 공중부양에 관심이 생기고
그러다 죽은 생선처럼 침울해 져서
짧은 질문을 던지지
동사무소란
무엇인가
동사무소는 간결해
시작과 끝이 명료해
동사무소를 나오면서 우리는
외로운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왼손을 들고
왼발을 들고.(동사무소에 가자, 부분)
함부로 겨울이야 오겠어?
당신은 지금 어디서 혼자 겨울인가?(겨울에 대한 질문)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는 드라이한 삶의 궤적을 따라 의문을 던져 본다.
그러나... 그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런저런 상념을 늘어놓을 뿐이라고,
시크하게, 한켠으로 겸손하게 말할 따름이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동사무소'에서 출생과 사망까지 간결한 문서로 정리되는
'특성 없는 남자'임을 겨우 밝혔을 뿐인 게다.
인생이란 작업을 통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