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을 범하다 - 서늘하고 매혹적인 우리 고전 다시 읽기
이정원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한국에서 고전문학이라고 하면, 교과서에 수록된 것들이 머릿속에 떠오를 것이고,
그 다음엔 어린 시절 동화로 읽었거나 만화나 영화로 본 것을 떠올릴 것이다.
이것들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권선징악>이 주제이며, <해피엔딩>이라는 공식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단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고전 속의 인물들은 아주 역동적이며, 그들은 생각만큼 선하지 않고, 악하지 않다.
현대의 대표적 해석이 '방자전'인데, 그런 상상력을 가할 수 있도록 작가는 유도하며 도와주고 있다. 

<장화홍련전>을 읽으면서, 가부장제라는 진범은 사악한 계모의 꽁무니에 숨어버린 시대의 위안물로 삼는다.
처첩제 가정소설에서는 늘 '희생양'을 제시한다.
강박적 가부장제 문화의 물리적 현현인 <집>은 거짓을 강요하고 답답하며 페쇄적인 공간인 반면,
<연못>에서는 해원을 위한 환상적 차원의 소통이 매개된다. 
수난을 개인적 차원으로 구조화하지만,
공포를 퍼뜨리는 데 성공하려면 공포를 얼마나 잘 표현했는냐도 중요하지만
문화 속에 각인된 불안을 얼마나 잘 드러냈느냐도 중요하다는 미국의 사회학자 배리 글레스너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장화 홍련전에 담긴 가부장적 공포가 이해가 간다. 

<심청전>에서도 심청의 죽음을 '효도'에만 머물러 보기보다는,
사회적 자살이란 측면에서 이념  공동체의 심청 살해 국면을 살펴 본다.
희생 제의에서 희생물은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에 저항할 수 없는데, 독자들이 심청의 죽음에 동의하는 사회라야 심청은 제물이 되고, 그 순간 독자 역시 심청이를 바치는 제의의 사제가 되는 것이다. 

<적벽가>에 대한 분석이 가장 감동적이다.
역시 판소리 적벽가의 백미는 <군사 설움 타령>인데,
영웅들은 전공을 세울 그 시간에 군사들은 집에 돌아갈 생각을 하게 된다.
군인은 전쟁터에서 사물화되고 정서적 개체성이나 실존의 무게를 지니지 못한 약자이므로 그들의 힘은 <울음> 뿐이다.
전체주의적 폭력에 희생되는 개인의 존엄을 나타내는 반봉건의 주제를 제시하는 군사 설움 타령의 해학성은 정말 뛰어나다.
구체적인 울음을 통하여 공공성을 띤 폭력에 노출된 개인의 존엄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전쟁의 상흔을 통하여 군인들에겐 무의미한 전쟁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장끼전>에서 어미의 사생활에 대한 의견도 재미있다.
공동체가 개인에게 최소한의 복지 혜택마저 제공하지 않는 조선 시대.
무능한 가장을 비호하는 현실에서,
4번째 낭군을 잃고 5번째 낭군을 맞는 까투리.
어떤 가장도 죽게 만들고 무능력하게 만드는 비극적인 세상.
유랑하는 장끼 가족의 궁핍은 마치 일제 강점기의 슬픈 소설을 읽는 것과 같다.
단단하고 행복한 가정은 한낱 꿈일런가.
진정 그것은 <오래된 미래>에 불과한 것일는지... 생각해보게 하는 멋진 글이다. 

<토끼전>에서는 ,
<너>와 같지 않은 <나>로서의 용왕의 논리를 보여준다.
작금의 정리해고 사태나, 비정규직에 대한 무자비한 공세, 해군기지 건설을 둘러싼 일방성 등을 생각하게 한다.
오죽하면 김진숙이 크레인에 올라가 아홉 달을 넘게 버티겠는가...
그러나 토끼 역시 선한 약자만은 아니다.
별주부의 아내를 취하고 별주부 아내는 토끼한테 반하고, 상사병으로 죽는데 열녀로 추앙된다.
이 소식 들은 별주부 망명하였다가 자결한다.
토끼에게나 별주부에게나, 용왕에게나, 별주부 아내에게나 <욕망만이 넘실대는 잔인한 세상>을 형상화한 소설. 

<지귀설화>는 공동체를 파괴하는 사랑은 금지하고 있는 세상을 풍자한다.
비참한 자멸의 불길에서 절망이 가득 담긴 진실을 보여주는 지귀 설화.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나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 노래>는 적확한 유추다. 

현대 사회와 가장 유사한 비꼬임은 <황새 결송>이다.
왜 정의는 패배하는가, 악한 사람은 교제성이란 유능함을 갖추고 왜 승리하고 있는가.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보게 만드는 꼭지.
아돌프 아이히만처럼 <사소한 악의 위험>에 빠지는 것.
내가 이렇게 한다고 세상에 큰 악을 끼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정의는 늘 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황새 결송은 곱씹어볼 주제가 아닌가 싶다. 

<김현감호>는 고딩 교과서에서 배웠던 소재인데,
김현의 입장에서 호랑이가 감사한 거지만,
거꾸로 본다면, 타자들의 감추어진 목소리에는 애써 무관심하려는 글로 읽을 수 있단다.
주류의 시선으로 읽어낸 성공담의 이면에는 늘 비주류의 희생이 역피라미드 형상으로 놓여있을 것. 

못난 너로 태어난 <김원전>
그 못난 너를 벗는 날, 희망을 가진다.
못난이로 태어났음에 불안한 인간.
뭘 해도 잘 되지 않는 나. 성인식의 고통스러움은 '작은 삼촌'을 떠올리게 한다.(뭔가 하려고 맘만 먹고 안 하는 거, 마음 먹고 삼일도 못 버티는 거, 이런 걸, 작( )삼( )이라고 하지? 이렇게 물었더니, 정답은 당연히 작심삼일인데, 엽기학생의 답, 작은 삼촌이었단 거...)
하찮은 악마 박명수를 붙인 것도 재미있다.
어느 세상에나 작은 삼촌은 있게 마련이다.
그게 자신일 때, 세상은 좌절스러운 것이고. 

권선징악을 윤리적 차원으로 강등시켜버린 통쾌한 소설이 <전우치전>이다.
일탈과 해방, 탈주를 일삼는 전우치.
단순명료한 이기심의 경쾌함과 엄숙함에 대한 조롱이 전우치의 특기다.
전우치의 이기적 페르소나를 작가는 읽어 낸다. 

누구나 가졌을 법한 의문들을 작가는 이런저런 철학적 도구를 들이대거나,
적합한 문학적 장치와 빗대면서 나름의 해석을 곁들인다.
이런 책 한 권쯤 옆에 두고 고전을 읽는다면,
그 고전은, 전과 다르게 읽힐 것이고,
충성, 효도, 정절... 등의 권선징악적 특징을 놓아버린 해방의 책읽기로 달려갈 수 있을 것이다.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파워북로거 지원 사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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